일원상과 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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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과 삼학
  • 관리자
  • 승인 2019.01.13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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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튼교무의 정전산책 (完) ㅣ 방길튼 교무(나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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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교법의 총설'을 보면 “법신불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모시고 수양·연구·취사의 삼학을 수행의 강령으로 정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일원상'은 수행의 표본이라면 '삼학'은 수행의 강령으로,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일원상을 표본으로 모시고 수양·연구·취사의 삼학으로 강령을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본(標本)은 본보기로 그것을 본 삼아 그대로 하는 것이라면, 강령(綱領)은 벼릿줄과 옷깃으로 벼릿줄만 당기면 그물 전체가 따라 올라오며, 옷깃만 잡으면 옷 전체를 집어 들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일원상을 표본하면 수행의 준거가 서게 되며, 수양·연구·취사의 삼학으로 강령 잡으면 수행이 전체적으로 따라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원상은 삼학으로 펼쳐져야 하고 삼학은 일원상에 근거해야 되는 것입니다. 일원상에만 그쳐 있어도 안 되고 삼학만 있어도 안 됩니다. 일원상만 있으면 현실에서 실행되지 못할것이고, 삼학만 있으면 근원이 단절된 자의적 행위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일원상 서원문'에서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를 하며 또는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를 하며 또는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여”의 전제로“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라고 한 것입니다.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삼지 않는 삼학은 '일원상의 수행'이 아니며,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삼으면 삼학으로 발현되는 것이 자연스런 일입니다.


일원상은 절대계와 현상계를 관통하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만일 일원상이 삼학으로 발현되지 못하고 내면에만 침잠한다면 이는 '일원상의 수행'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절대계인 자성의 계정혜만 체득하면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이라 한다면 이는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뜻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자성만 체득하면 수양할 것도 없고 연구할 것도 없고 취사할 것도 없다 하여, 공부도 다 마쳤고 수행도 다 마쳤다고 여긴다면 '일원상의 수행'을 오해한 것입니다.

성품자리에서 보면 본래 닦을 것이 없는 자리이나 이렇게 닦을 것이 없는 자리는 현실에서 끊임없이 닦되 본래는 닦을 것이 없다는 것이지, 실제 현실에서 닦는 자체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현실에서는 처한 상황에 따라 수양·연구·취사의 삼학으로 끊임없이 닦아가야 합니다.


만일 성품만 붙잡고 있으면서 삼학이 다 구현되었다고 여기면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닦을 것이 없는 일원상을 표본하여 삼학으로 끝없이 닦아야 하며, 삼학으로 닦고서도 일원상을 표본하여 닦을 것이 없는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설사 닦을 것이 없는 성품자리에 들었다 해도 실지로 삼학을 수행하지 않으면 '일원상의 수행'은 아닌 것입니다.


피서하는 것처럼 선정에 들어 경계를 멸진정 할 수는 있어도 현실에서 삼학으로 나투지 못한다면 이는 '일원상 수행'의 공덕은 아닌 것입니다.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삼학수행을 하지 않고 성품에만 머물러서, 더 이상 할 것도 배울것이 없다며 유유자적하게 노니는 것을 수행의 진면목이라 여기는 것은 공부길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러므로 <정전> 참회문에서 “견성만으로써 공부를 다 한 줄로 알고, 견성후에는 참회도 소용이 없고 수행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비록 견성은 하였다 할지라도 천만 번뇌와 모든 착심이 동시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요 또는 삼대력을 얻어 성불을 하였다 할지라도 정업(定業)은 능히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마땅히 이 점에 주의하여 사견(邪見)에 빠지지 말며 불조의 말씀을 오해하여 죄업을 경하게 알지 말지니라.”하며 경계하고 있습니다.

<정전>에서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모시게 하고 삼학을 수행의 강령으로 정한 것은 큰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일원상'장과 '삼학'장을 따로 둔 것도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진리계인 일원상 자리에 바탕하여 현상계에서 삼학으로 끝없이 수행하고, 현상계에서 끝없이 삼학수행을 하되 일체의 상에 물들지 않는 일원상에 근거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우리는 현실의 현상에도 떨어지지 않고 또한 절대계에 머물러만 있는 무용한 수행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야 절대계와 현상계를 관통하고 있는 일원상의 진리를 현상계에서 삼학수행으로 나아가고 나아가서 복혜구족한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

# 그동안 소중한 글로 함께해주신 방길튼 교무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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