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한울안신문
뒤로가기
정신개벽의 과학
정신개벽의 과학8
인간 생존을 위한 가르침: 정신개벽
2021. 08. 24 by 박시형 교도
박시형<br>강남교당 교도<br>서울대학교 연구교수<br>​​​​​​​지능형반도체포럼 위원장
박시형
강남교당 교도
서울대학교 연구교수
지능형반도체포럼 위원장

지난 주, 한 옥스퍼드 대학의 생리학 명예교수인 데니스 노블이 한국의 산사에 와서 머물다간 이야기가 한 일간지를 장식했다. ‘나이가 들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으면 두 가지 질문에 집중하게 됩니다. 첫째는 산다는 것이 무엇이고 둘째는 죽음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다. 아무리 생명의 오묘함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고 학자로서 명예를 얻었다 하더라도, 죽음을 앞두고 무언가 흐릿하게 풀리지 않은 것이 있다고 느낀 것이다. 그는 그 해답을 찾으려 한국의 산사를 찾았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생각해 보자. 호모사피엔스라는 종으로 출현해서 30만 년 만에 지구를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지난 300년 동안 석유·석탄을 거덜냈다. 그것도 모자라 매년 경기도 면적만큼의 아마존 밀림을 사라지게 하고, 대부분 야생동물을 멸종시키고 있다. 펑펑 쓴 석유·석탄 때문에 지구가 뜨뜻해지고 북극 얼음이 녹고 있다. 자칫하면 20년 이내에, 북극 얼음이 사라질 것으로 전망한다.

전지전능하게 보이는 인간, 그러나 다른 면으로 보면 외롭고 위태하고 가련하다는 생각이 든다. 천지 사방 넓은 우주에서 한 점도 되지 않는 곳, 이 지구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가련한 존재이다. 지구의 나이에 비하면 순간도 되지 않을 짧은 시간 동안 석탄을 땠다고 인류는 혼나고 있다. CO2 배출로 인한 기후 변화, 자원의 고갈로 인류의 미래가 불확실해지고, 심지어 지속가능성에 대해서 우려를 나타내는 지식인들이 많다. 그렇다고 사람들끼리 서로 화합하고 서로 보호해 주는 것 같지도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난 2500년 동안 태어난 위대한 가르침들은 인류에게 주는 어떤 보호막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처는 인류에게 처음으로 ‘나’라는 것이 없다고 가르쳤다. 확실하게 느껴지는 ‘나’라는 실체가 없고 모든 괴로움의 근본이 실체가 없는 ‘나’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집착에서 해방되는 순간 느끼는 말할 수 없는 깨달음, 영성을 불성이라고도 이야기했다. 엉뚱해 보이는 생각이 수천 년 동안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다.

아브라함은 인류에게 처음으로 하나의 신을 제시했다. 이스라엘 하느님 말이다. 과학을 모르던 긴 세월, 많은 사람들이 모든 사물에 신을 붙이던 시절, 모르는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신’을 제시했다. 이 신은 사람을 시험하고 벌을 주는 신이었다. 이후 예수는 무서운 ‘신’을 해방시켜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예수의 가르침은 복음서를 쓴 사람들을 통해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발전했다. 그러나, 기독교 국가가 주도한 제1·2차 세계대전과 제국주의의 피해로 ‘신은 죽었다’고까지 하고 있다.

 

 

원불교 가르침은 어느 한 집안이나 나라,

그리고 종교라는 옷으로 한정시킬 필요가 없다.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인류가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다.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과 행복을 위해서 말이다.

 

100년 전 혼돈과 혼란의 시대, 인류에게 천지가 은혜라는 가르침이 출현했다. 가장 억압을 받던 나라에서 빛 같은 가르침이 나온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눈부신 과학기술과 문화가 발전했지만, 원불교와 같이 보편적인 가치를 가지고 빛을 발하는 가르침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일원은 바깥으로만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거두기만 하면 누구나 만나게 되는 빛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마음의 끝 같은 것이 바로 ‘일원’이다. 따라서 일원을 만나는 것은 돈이 들지 않고 힘도 들지 않는 일이다.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복음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일원은 우주의 변화를 주재하는 하느님 같기도 하고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작용하는 ‘음과 양의 기(氣)’ 같은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몸과 마음 작용을 따라서 나쁜 해악을 ‘은혜’로 만들어 주는 주재자이다. 따라서 매 순간 마음자리에 머물며, 삼라만상과 접하는 모든 것을 은혜로 대하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살아가야 하는 방법이고 미래 지속성을 보장하는 보호막이다.

산 깊이 들어가서 일생을 고단하게 만들 필요도, 과학과 대립하는 창조자를 만들 필요도 없다. 일원이 주재자이고 창조자이며 모든 사람이 마음의 빛을 안으로 돌리기만 하면 만나는 하느님이다(〈대종경〉 전망품 14장). 이러한 가르침을 실제 생활에서 명료하게 보여 준 스승을 우리는 모시고 있다. 원불교 가르침은 어느 한 집안이나 나라, 그리고 종교라는 옷으로 한정시킬 필요가 없다.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인류가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다.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과 행복을 위해서 말이다.

8월 27일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민홍 2021-09-16 23:45:22
저도 성인들의 가르침이 인류의 최후 보루이자 보호막이 되어왔다고 느끼는 요즘입니다. 일원을 보고 이해하다 보면 그걸 파악하는 사람에 따라 하나님(God)이라 이해할 수도 있고, 리(理)와 기(氣)라고 이해할 수도 있고, 도(道)라 부를 수도 있고, 무극, 태극이라 부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브라흐마나 범신이라고 이해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아인소프(Eis sof, 무한자)라고 부를 것이고, 어떤 사람은 공적 영지라고 부르겠지요. 대종사와 정산종사께서 진리를 전체 그림(대/소/유무)을 알려주셨으니, 이제 원불교는 유불선 회통을 넘어 기독료, 유대교, 그리스 철학 등과도 교리적 회통을 해야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