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대연 40주년 | 연원회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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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연 40주년 | 연원회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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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8.30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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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연 40주년 특집 - “나의사랑, 원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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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수백 년, 수천 년의 깊은 인연

글로벌 유력 기업도 30년을 넘기기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우리 연세대학교원불교교우회(이하 연원회)가 35년을 맞이했으니 참으로 대견하다. 이제 기억도 조금씩 가물가물하지만 그 때를 되돌아보면 아직도 감회가 새롭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어머니를 따라 대구 대현교당에 다니기 시작한 후 학생회를 거치면서 원불교 신심이 많이 높아졌다. 교리 퀴즈 대회, 성가대회, 그리고 특히 여름 방학 때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과 함께 보낸 총부 훈련을 통해 원불교적 인생관과 종교관이 깊어만갔다.


대구에서 원불교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기에 연세대로 대학 진학(82학번)이 결정 났을 때 원불교 대학생활동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또 당시의 대현교당 학생회를 지도해 주셨던 유이경 교무님의 강한 권유도 있었다.


하지만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대학에서의 원불교 활동은 정말 쉽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정통파 기독교 대학인 연세대에서 이웃종교 활동을 서클 형태로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일단 학교 근처에 하숙생활을 시작하였고 근처에 있는 신촌교당 청년회에 다니면서 서울에서의 원불교 생활의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서 여러 채널을 통해 연세대에 재학 중인 원불교인을 찾아보았고 쉽지 않았지만 호시탐탐 기회만 노렸다. 하지만 시간은 계속 지나가고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초조한 마음에 결국 스스로 학교 벽보판에 과감히 종이 포스터를 붙이기로 결심하였다. 당시에 학교 승인을 받지 않고 붙인 포스터는 불법(?)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이때 손 글씨로 준비한 포스터는 단 석장, 제목은 '연세 원불교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학교 내 노천극장에서 지정된 날에 만나자고 적어 두었다. 당일 '과연 누가 올까?'라고 기대하면서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약속시간 30분 전부터 노천극장에서 기다리는데 전홍연 선배(83학번, 치의예과) 등 다섯 명이 나타났고 바로 이 분들이 우리 연원회의 초대 창립 멤버가 되었다.


서로 처음 만난 자리였지만 전혀 어색치 않았고 우리는 수백 년, 수천 년의 깊은 인연이 작용하였고, 사은님의 큰 보살핌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이것이 바로 35년전(1982년) 우리 연원회의 시작이었다. 이후 우리는 전홍연 선배를 회장으로 모시고 나름 조직을 갖추고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원불교 대학생 동호회가 연세대에서 당시 정식 허가를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굴하지 않고 신촌교당에서 연원회 청립 법회를 시작으로 학교 내에서 서클 등록은 되지 않았지만 당시 상경대 건물 한쪽 강의실 옆에서 목탁도 두드리면서 미니 법회도 보고, 교리 공부도 해 나갔다. 그리고 당시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과 어울려 이 땅의 민주화를 고민하면서 원대연 활동에도 열심히 참가하면서 연원회의 이미지와 위상을 높여 나갔다.


이후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 우리의 모임은 '여원회(졸업한 연원회 OB모임)'로 다시 한 번 승화되었고 많은 연원회 선후배들의 정성과 노력으로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해왔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연원회와 여원회에 대해 정말 많은 애착을 느끼고, 35년 동안 이끌어준 우리 후배들이 너무 고맙고 자랑스럽다. 이제 우리 후배들과 연원회 선배들이 하나가 되어 은혜에 충만한 연원회의 또 다른 35년 아니 3000년을 기대해 본다. 연원회여 그대는 영원하리라. '연원회, 여원회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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