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의수와 함께 하는 우리 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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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수와 함께 하는 우리 문화 이야기
  • 전지만
  • 승인 2001.04.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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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에서 한계령 쪽으로 조금 나가다가 홍천 가는 길로 들어서 약간을 가면 남대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후천을 만난다. 이 후천은 오대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로 맑고 차가운 물이 급류를 이루고 있어서 보기에도 시원하다. 선림원이 있는 부근의 골짜기를 따로 미천골이라 부르는데 이는 옛날 선림원에 많은 스님들이 머물고 있어서 밥을 지을 때면 쌀 씻은 물이 골짜기를 하얗게 할 정도였던지 미천(米川:쌀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하여 온다. 경치 또한 일품이어서 가는 길이 지루하지가 않다.
고려초 3대 선원인 도봉원, 희양원, 고달선원과 함께 선원으로 유명하였던 곳인데, 고려초에
산사태로 매몰되어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1948년 이곳에서 정원이십년명(貞元卄年銘:804년)의 신라범종(新羅梵鐘)이 출토(出土)되어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이 범종은 곧 오대산 월정사로 옮겨졌었는데 6.25때 사찰의 화재로
불에 녹아 지금은 보기에 애처로운 모습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 절터는 약 3천 여 평 쯤
되는데, 발굴 결과 여러 건물지도 확인된 바 있다. 현재는 몇 기의 석조유물들이 정리되어
남아 있다. 3층석탑, 부도, 탑비의 귀부 및 이수 등이다. 사지(寺地) 전역에서는 신라 하대
로부터 고려 초에 이르는 와편(瓦片)들만 출토되고 있어 그 역사가 짧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3층 석탑은 이중의 기단 위에 3층으로 쌓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이다. 특이한 것은 상대
면석(上臺面石)에 8부신중상을 배치하였는데, 좌상(坐像)으로 무구(武具)를 쥐고 있는 모습
이다.
이 석탑에서는 1965년에 보수 당시 기단부에서 60개의 소석탑(小石塔)과 동탁(銅鐸)이 발견
된 바 있다. 부도는 일제 때 완전히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65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
여 놓았다. 하대받침은 8각인데 각면의 안상에 교대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양각되어 모두
네 마리가 있는 셈이며 나머지 네 곳의 안상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 부도는 홍각선사
(弘覺禪師)의 묘탑(墓塔)으로 추정되고 있어 대략 886년(신라 정강왕 원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부도와 함께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홍각선사비는 현재 귀부와 이수만 제대로 남
아 있고 비신은 그 파편 일부가 서울로 옮겨져 보관되어 있다. 목이 짧은 머리는 곧바로
세웠는데 비교적 부드러운 모습이다. 정수리에 파여진 작은 홈은 별도로 마련된 뿔을 꽂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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