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봉공 無我奉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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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봉공 無我奉公
  • 한울안신문
  • 승인 2001.10.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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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송규종사 1900-1962


무아봉공(無我奉公)은 나를 없애고 공(公)을 받드는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이요, 원불교의 공도(公道) 정신이니라. 부처님은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무아봉공(無我奉公)의 화신(化身)이셨나니 곧 나를 잊어야 세계 인류를 위하는데 몸을 바치게 되나니라. 공자님의 인의(仁義)나, 부처님의 자비나, 예수님의 박애(博愛)가 나를 없애고 공을 받드는 데에는 다 같은 뜻이니라.
과거에는 나 하나 잘 살고, 내 가족 잘 사는데에 그쳤으나 앞으로는 문화와 지혜가 발달에 따라 우리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사은(四恩)으로 한 권속이 된 것과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이 합해서 일신(一身)이 된 근원적인 은혜를 알아야 잘 살 수 있나니라. 머리가 둘 달린 뱀 이야기가 있나니 어떤 머리가 무엇을 먹든 결국 일신(一身)을 위하는 것이거늘 하루는 맛있는 쥐새끼를 한 머리가 독차지하여 먹자 그것에 화가 난 다른 머리가 독(毒)을 먹고 그만 죽어버렸다는 우화(寓話)이니라. 그냥 간과할 우화로 여기지 말고 그 속에 새겨야 할 교훈이 있나니라.
무아봉공은 자기를 희생해가며 중인을 위하는 사람이 참된 전무출신(專務出身)이니라.」

원동태허 圓同太虛
무흠무여 無欠無餘
원동태허(圓同太虛)·무흠무여(無欠無餘)라 , 이 구절은 일원상을 두고 하신 말씀인 바, 두렷하기가 태허공(太虛空)과 같아서 모자랄 것도 없고 남음도 없다는 저 지나(支那) 제3조(弟三組) 승찬대사(僧燦大私)께서 지으신 ‘신심명(信心銘)’중 한 구절이니라.
곧 내 마음에 사심망상이 없을 때가 일원상이니, 모든 일을 원만하게 하고 보면 무흠무여의 행을 할 수 있나니라. 무흠(無欠)은 부족한 것도 없고 잘못된 것도 없는 지경이요, 무여(無餘)는 만족할 것도 없고 잘 했다고 할 것도 없는 지경이라, 우리 공부인이 만일 이망념(離妄念)하면 여여불(如如佛)이니라.
승찬대사(僧燦大師)는 지금으로부터 약 1천4백년 전에 지나(支那)수대(隋代)의 사람으로 2조(二組)혜가(慧可)에게 법을 받으시었으나 북주(北周) 무제(武帝)의 불교 배척이 극심할 때를 당하여 사공산(司空山)에 은둔하여 십여년간 수양을 하시며 기회를 기다리시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4조(四組)도신(道信)을 만나 법만 전하시고 입적하시었으니, 이 신심명(信心銘)은 산중(山中)에서 수양(修養)에 힘쓰시다가 지으신 글로서 달마(達磨) 이후 불조(佛組)단전(單傳)의 선요(禪要)를 운어(韻語)로 저술한 선문(禪門) 최고(最古) 보전(寶典)의 하나라, 승속(僧俗)간에 존중히 여겨오는 경전이니라.
이 구절은 성품의 지경(至境)을 말씀하신 것이라, 언어로써 풀이할 것이 되지 못하나 강연(强然)히 의해(義解)한다면, 원동태허(圓同太虛)라 함은 우리의 본래 심지(心地) 자리는 태허공(太虛空)과 같아서 일호(一毫)의 진애(塵埃)가 없이 청정하다는 것이니라. 무여(無餘)하 함은 우리의 분별심은 참 마음이 아닌지라 우리가 수양을 쌓아 천념(千念)을 백념(百念)으로, 백념을 십념(十念)으로, 십념을 일념(一念)으로 만들어 일념까지라도 남음이 없이 없어져버린 자리가 곧 우리의 자성이라는 뜻이며, 무흠(無欠)이라 함은 우리의 성품은 단지 공한 것만이 아니라 이 성품 가운데는 우주 만물과 산하대지가 무엇 하나 빠짐없이 다 갖추어 있다는 뜻으로, 본래 마음은 진공(眞空)한 가운데 묘유(妙有)가 있다는 뜻이니라. 그래서 불법문중 불사일진(佛法門中佛捨一盡)이라 하였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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