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이들과 함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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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이들과 함께하며
  • 전재만
  • 승인 2001.12.2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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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피스 봉사가 내게 가르쳐 준것


이대원 교도(장충교당)


마지막 임종환자를 지켜봤습니다. 재성님, 미진님은 환자를 보고 기도 하는데 저는 처음 교실을 들어가는 1학년 학생처럼 떨리고 두려워 환자의 다리끝만 만졌습니다. 그때 환자의 다리가 차지는 느낌을 받고 무서웠습니다. 다리를 만지는데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재성님, 미진님은 어떻게 기도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정말 무서워서 기도할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을땐 다리가 먼저 차가워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몇일 후 젊은 여자 암환자가 임종을 하였습니다. 그 환자 눈동자가 너무 맑고 예뻐서 감히 멀쩡한 사람이 곁에서 보기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따뜻하게 대해줘야 하는데 그때 전 아무 것도 준비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그 젊은 여자환자의 남편은 초등학교 선생님이고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엄마가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막 돌아 다니는 겁니다. 새벽 영안실에서 염을 해야 하는데 저는 다 수습하고, 가리고, 닦고 하는데 시체가 여섯구가 있는겁니다. 옆에 다른 봉사자들도 정성껏 염을 하고, 담담히 기도하는 것을 볼때, ‘이렇게 저런 일을 함께하는구나’하는 생각으로 자꾸만 이끌려 가는거에요. 그때의 그 느낌이 각오를 새롭게 하는 동기가 되었어요.
더군다나 우리 원불교 안에도 봉사기관이 많지만 호스피스 봉사는 정말 저에게 와 닿는 부분이 너무 많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봐온 환자중에서 37세의 진행성 급성위암환자가 있었습니다. 많은 환자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이사람을 꼽은 이유는 이 환자는 전립선이 늘 당기고 아프다고 호소하셨습니다. 그분의 아버지는 37세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늘 도전적이고 싸움을 하려고 그랬어요. 그런 분들은 신앙생활을 해야 마음도 편안해지고 아픈 곳도 잘 치료된다고 느꼈습니다. 7월에 발병해서 항암제를 4번 맞고, 12월에 수술하고, 36번의 방사선치료를 했는데도 다시 재발해서 긴 병상생활을 한 환자였습니다. 그후에도 호전되는 기미는 전혀없어서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진통제를 써도 차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죽으러 왔다’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 늘 그러신 환자였지만, 부인이 곁에만 있어도 그렇게 좋아했어요. 곁에서 만져주기만 해도 안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위암은 암중에서도 고통이 심해요. 진통제를 써도 별 효과가 없어요. 미소년 같던 그 환자의 얼굴은 앙상히 뼈만 남은 몰골이 되어갔고, 그 모습이 너무 무서워 사람들은 곁에 갈 수도 없어요. 하지만 저는 늘 다녔던 경험으로 보내는 작업을 함께 해야한다는 생각과 그것은 ‘우리 신앙하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다짐 했습니다. 부자는 봉사하지 않아도 되지만, 가난한 사람은 봉사해야 됩니다. 복 지으면 복 받아요.
점점 쇠약해지고 그렇게 도전적이던 그분이 나중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어요. 이젠 도전할 기력도 없게 된거죠. 가서 만지고, 주물러주고, 귀를 만지고 아주 민감할 때 귀가 딱딱해진다고 교육받았어요. 귀를 만져주고 얘기를 해주면 잠들 수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까지, 돌아가실 때까지 귀가 열려 있었어요. 조그만 케익을 좋아하셨는데 호스를 빼고 돌아가시기 직전이였는데 ‘제가 왔어요’하니까 눈물을 흘리시는 거에요. ‘환자는 마지막에 귀가 열려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환자분은 임종을 얼마두지 않고 너무 아파서 마지막에 기독교에 의지했더라구요. 환자를 대하면서 느낀 부분은 환자가 제일 좋아하는 말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부인과 정좋은 사람은 부인 얘기를 하면 목소리가 커지고 자녀를 잘 두신 분들은 자녀에 대한 얘기를 하면 목소리가 커져요. 그래서 저는 메모 해 두었다가 ‘다음에도 이런 얘기를 해야되겠다’고 생각하죠. 어떤 분은 유학간 자랑스런 딸 얘기를 하면 쓰러졌다가도 벌떡 일어나요. 목소리가 커지면 그 순간 아픔을 쉬게 되더라구요. 환자가 하는 또렷한 말에 귀기울이면 환자와 가까워 질 수 있더라구요.
봉사는 또한 자손과 그 가정을 변화시킵니다. 예전에 제 어머님이 누가 초상이 나면 그집에 가서 날을 세요. 그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그전에 시골에서 어머님이 부녀회장을 하셨는데 우리밭은 보리보다 귀리가 더 커요. 그런데 어머니는 귀리밭을 안 매시고 남의 일만 하시는게 그렇게 불만이였는데 이제와서 돌아보면 제가 그걸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얼마 전에 통역 도우미를 구한다고 해서 딸에게 해보라고 했더니 역사박물관 통역봉사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애들도 엄마를 따라서 남을 도와주고 배려하고 그렇게 하더라구요. 딸이 봉사를 하면서 외국에서는 18세만 되면 독립해서 다하는데 ‘자기도 할 수 있다’며 외국유학을 가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외국에 가겠다고 기도를 하는거에요. 남편에게 딸 아이 소원을 풀어주자고 기도를 같이 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간절한 기도문을 써서 기도를 했지요. 그런데 기도를 해서 안되는 것이 없더라구요. 백일동안 열심히 했더니 그일이 이루어졌어요. 파리에서 김재형 부교님의 연락이 온거에요. 그것은 절대 개인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에요. 진리의 힘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아요.
유학은 아무나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였는데 기도의 위력이 이렇게 나타나더라구요. 몇십년동안 기도하고 봉사하고 하니깐 자녀들이 성공으로, 혹은 건강한 미래를 명대로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생기더라구요. 정말 봉사하고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고, 부자는 돈 있어서 살 수 있지만 가난하면 열심히 기도하고 복을 짓고 살아야 그 진리가 나에게 혹은 자녀들에게 큰 위력으로 다가오는 거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정리 김산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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