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수행의 요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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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수행의 요법(2)
  • 전재만
  • 승인 2002.05.23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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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송규종사 1900-1962


2조 심지(心地)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境界)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혜(慧)를 세우자.

「우리의 자성은 원래 공적영지(空寂靈知)하고 영지불매(靈知
佛昧)하여 무애자재(無碍自在)한 반야지(般若智)가 천연적으
로 갊아 있어 제법개공지처(諸法皆空之處)에 진공묘유(眞空妙
有)의 자리이니라. 그러나 중생들은 다겁을 내왕하면서 원래
의 영지불매(靈知佛昧)한 반야지(般若智)의 물욕에 방치하여
칠칠(漆漆)한 무명(無明)에 절어 있나니, 마치 밝은 달을 검
정 구름으로 뒤덮듯이 온갖 욕심을 따라 어리석은 중생(衆
生)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나니라.
곧 부처님은 본래 영지불매(靈知佛昧)한 반야지(般若智)를
더럽힘 없이 간직하시와 항상 명랑하고 무애자재(無碍自在)
한 반야지(般若智)에서 생활을 하게 되나니라. 그러나 우리는
반야(般若)의 고향을 버리고 분별(分別)의 객지(客地)에 나와
오욕(五慾)과 애착(愛着)·탐착(貪着)에 끌려 허위(虛僞)와 업
보(業報)를 분석(分析)치 못하고, 시비이해(是非利害)의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여 전도견(顚倒見)을 하며, 또한 사심(邪心)
과 진심(眞心)을 분간치 못하고 생활하나니라.
그러므로 보통 사람들이 자기 자손의 허물을 알지 못하고 자
기의 허물을 알지 못하는 것이 모두가 애착에 끌려서 밝음을
잃고 우치(愚痴)가 주장이 되었나니라.
또한 물체(物體)도 타물(他物)이 좋게 보이기 때문이니 이것
은 모두가 안분(安分)을 얻지 못한데서 생(生)함이요 탐착에
끌려서 또한 그리 된 것이라, 만일 이와 같이 색(色)을 대하
면 색욕(色慾)에 뒤덮이고, 재물(財物)을 대하면 재욕(財慾)에
뒤덮여 정견(正見)을 하지 못하고 전도견(顚倒見)을 하게 되
므로 결국 세상에 거(居)할 때에는 시비를 가리지 못하여 무
명(無明)으로 고뇌(苦惱)의 생활을 하게 되고, 찰나 찰나에
육근(六根)을 작용하는 바가 모두 죄고(罪苦)로 화하게 되어
영(靈)과 육(肉)이 상별(相別)할 때에는 평소 그대로 허위(虛
僞)와 업보(業報)를 분간하지 못하여 지옥(地獄)의 서문(西門)
도 극락의 극락지(極樂地)로 보이고, 생(生)의 유희장(遊戱場)
도 선인(仙人)의 신선지(神仙地)로 보여 잠깐 참예(參詣)한다
는 것이 영원한 악도(惡途)에 타락(墮落)하여 무량겁(無量劫)
에 극신(極辛)·극고(極苦)를 받게 되나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리석음을 없애야 할 것이니 그 방법
은 먼저 명랑한 반야지(般若智)를 회복해야 할 것이니라.
무엇보다 먼저 법설을 많이 듣고, 널리 선각자(先覺者)에게
묻기를 좋아하며, 의심을 걸어 깊이 생각하여 원래 어리석음
이 없는 명랑한 자성(自性)을 생각하고 사모(思慕)해서 천만
경계·백천업(百千業) 가운데서 항상 무착무애(無着無碍)하여
상광현전(常光現前)이 되어 반야의 고향에 돌아가야 하나니
이것이 곧 자성혜(自性慧)이니라.
중생들이 천만 죄악을 짓고 온갖 고뇌 속에 사는 것이 모두
인생의 근본이 되는 생사이치(生死理致)를 모르는 탓이요, 고
락의 근원을 알지 못한 탓이라, 그러므로 이 반야의 고향만
찾는다면 몰라서 가는 악도(惡途), 몰라서 짓는 죄(罪), 몰라
서 어두운 시비(是非) 등이 장중(掌中)에 구슬같이 뚜렷이 나
타나서 능히 육도(六途)를 초월하고 능히 생사를 초월할 것
이며, 인과원리(因果原理)를 알아서 천만 죄고(千萬罪苦)를
당할지라도 능히 해탈(解脫)하여, 고락이 따로 없고 시비가
따로 없어서 하는 말은 반야설(般若說)을 할 것이요, 육근(六
根)을 작용하면 다 반야행(般若行)을 할 것이니, 이 지경에
이른 즉 부처님의 지혜(智慧)를 가졌다 할 것이요, 자성(自
性)의 혜(慧)를 세웠다 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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