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교화 " 러시아 연해주 우스리스크 개척교화 보고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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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교화 " 러시아 연해주 우스리스크 개척교화 보고서 4
  • 한울안신문
  • 승인 2002.09.2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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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의 역사


한화중교무


오늘 이야기는 연해주(프리모르스키)와 고려인들의 삶에 대한 것이다.
연해주는 말 그대로 ‘바다가 연해있는 주’란 뜻이다. 면적은 남한의 1.7배 정도이고 그 중 산림지대가 70%를 차지한다. 인구는 약 215만 명이며, 민족구성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26개의 시베리아계 소수민족을 포함하여 19개 민족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 그 중에서 고려인은 3만 명 가량이 연해주에 거주하고 있다.
연해주의 주요도시는 수도인 블라디보스톡(약63만명)과 나호트카(약19만명) 우리가 살고있는 우스리스크(약16만명)와 아르춈(약11만명)등 9개 도시와 25개 군으로 이루어져있다. 사적으로 보면 연해주는 현재 러시아 땅이기는 하지만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러일전쟁)도 함께 공존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어느날 사교무와 나는 우스리스크 시내에 있는 공원에 간 일이 있었는데 중앙에 세워진 것을 보며 “저건 러시아 문화가 아니라 우리 문화 같은데......”라며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돌로 만든 아주 거대한 거북이였다. 거북이 등에는 비석이 세워졌을 것 같은 흔적도 함께 있었다. 때 마침 아는 사람을 만나 물어보니 발해 유적이란다. 연해주는 우리 민족이 세웠던 발해의 유적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 아파트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도 발해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절터의 주춧돌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연해주는 중국 땅이었다. 중-러전쟁에서 중국이 지고 1860년 북경조약에 따라 러시아 제국에 편입하게 되고, 1923년 소비에트정권이 수립된다.
현재 우스리스크는 러시아 시장보다 중국시장이 더 크고 더 많은 물류가 교류되고 있다. 현재 살고 있는 우리민족을 조선족이라고 한다면 러시아의 우리민족은 고려인(까레이스키)이라고 한다. 고려인이란 한국에서 변형하여 부르는 명칭이라고 한다. 선왕조 말엽 조선사람들이 가난과 기근 등 어지러운 나라 사정의 문제로 국경을 탈출하여 연해주로 갔다. 그들은 그 곳에 살고 있는 러시아 사람들에게 연해주가 고려시대 때 자기 국가의 땅이었다는 것을 전하려고 고려사람이라고 명칭하였던 것으로 본다. 고려인의 연해주로의 이주사는 1830-40년대 계절 영농이민 연해주에 체류, 1860년대 초 경제적 목적으로 연해주 정착이민이 시작되었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 전후로 정치적 목적으로 연해주로의 이민이 급증하였고 1910년 약 4만 명이 거주, 블라디보스톡 시내에 한인촌이 형성되었다.
1919년 삼일운동 이후에 항일 이민의 배증으로 1923년에는 약 11만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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