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는 눈, 세계를 보는 눈
상태바
세상을 보는 눈, 세계를 보는 눈
  • .
  • 승인 2003.06.19 1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중원 " 화곡교당
여러분들은 살면서 어떠한 만남을 만들어 가십니까? 나와 상대가 만나서 남이라는 만남을 만들어 가십니까 아니면 나와 남이 만나서 ‘우리’라는 관계를 만들어 가십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바로 너와 내가 만나 우리라는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처절했던 어린시절
저는 인생이 괴로워서 자살을 많이 시도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자살을 3번째로 시도했다가 실패해서 깨어났을 때 한 스님이 저를 물끄러미 보시면서 “어리석은 중생아! 죽으면 어디로 가는 줄은 알고 죽어야 될 것이 아니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현재 여러분들은 어디를 향해서 가시고 있으며 원불교를 왜 만나 이렇게 앉아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자신의 인생에 대한 설계가 되어서 언제까지 얼마를 벌고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성공을 계획하지 않았다면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고물상을 하고 어머니는 세탁 일을 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시절에는 너무나 가난해서 수업료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중학교를 졸업하고 독학해서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합격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법대에 갔고 사무관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아버지도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가난해서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가난해서 못 배우는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27세 모든 것을 잃음
그런데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아이들을 가르치고 하숙집에 돌아오는데 갑자기 나타난 자동차 불빛에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리뼈가 모두 부서져서 몸을 지탱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낳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7개월이 지났을 때, 의사가 최선을 다했다면서 평생 지팡이를 지고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절망적이고 울분이 끓어 올랐습니다. 더구나 직장에 돌아가니 제 자리는 이미 없었습니다. 제 나이 27세에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저는 골방에서 나를 불구로 만든 사람을 그려놓고 심장에 표창을 던지면서 복수심만 길러갔습니다. 하지만 남의 눈에 눈물나게 하면 나의 눈에 피눈물이 난다는 것을 알기에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낮에는 밖에 돌아다니지 못하니까 밤에 소주를 사서 무덤가에 가서 술에 취해 잠들었고 새벽이면 어머님이 후레쉬를 비추시며 눈물을 흘리며 서있었습니다. 이런 생활을 1년6개월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는 위가 헐어서 물만 마셔도 고통스러운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나의 한쪽 다리를 대신 할 여인 하나만 있다면 살아갈 희망이 생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에게 시집올 여자는 없었습니다. 결국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도 잃은 저는 수면제를 먹은 후 병원에 실려갔고 혼수상태였습니다. 의사들도 포기를 했는데 어머니의 기도 때문인지 사흘이 지나서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그 때 3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그 누구도 내 인생을 살아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둘째, 언젠가 죽을 것인데 서둘러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내 어머님이 살아 계시는 한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보이지 않게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난을 꼭 벗어나 부자로 살아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109전 110기
여러분들은 직장을 얻기 위해 몇 번이나 문을 두드렸습니까. 저는 무려109번이나 떨어졌습니다. 서류에서는 합격하는데 면접에서 항상 떨어졌습니다. 109번째 도전한 신동아 화재면접을 보러 갔는데 면접관이 제 다리를 보고 제 서류를 찢어버리고 안내하는 사람에게 당장 끌어내라고 했을 때 저는 참았던 분노와 설움에 그 자리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면접관이 할 말 있으면 하라고 해서 “제가 당신의 자식이라면 이렇게 할 수 있겠냐”면서 “2년 이내에 나를 모시러 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면서 제 이름 석자 「조용모」를 꼭 기억하라고 하면서 뒤돌아 나왔습니다. 그 후 다른 보험회사 대리점에 취업하고 한 발로 자전거를 타고 하루에 백리 이백리를 달리며 하루에 내 명함 50장을 남의 명함 50장으로 바꾸려는 의지로 삶을 불태웠습니다.
얼마나 먹고 살아야하겠다는 의지로 살았는지 목발 짚은 겨드랑이 살이 이그러지고 엉덩이에 진물이 나서 집에 돌아오면 온몸에 피가 적셔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이면 온몸이 퉁퉁 부어서 목발을 짚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 나와야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구체적 인생의 목표
여러분은 하루의 목표가 무엇이고 일주일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저는 하루에 5명을 보험에 가입하도록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하루 목표에 한 명이 부족해서 밤12시가 다 되었는데 경찰서에 들렀습니다. 경찰이 어이가 없다는 듯 하면서도 보험에 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자네 참 무섭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하루를 살더라도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서 살아가야 합니다. 권력과 재산이 없다면 오직 근면과 성실로써 성공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동차보험을 하면서 자동차의 사고 뿐만 아니라 사고 처리까지 해결할 수 있는 공부를 하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형법을 전공했기 때문에 법정문제에 대한 지식을 갖추었고 저의 명함을 돌렸습니다. 여기저기 많이 보험처리를 하면서 저에 대한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보험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109번째로 떨어졌던 신동아화재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안을 들어주는 대신 한가지 조건을 들어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면접을 보지 못하게 했던 그 면접관이 제 앞에 와서 잘못했다고 사과하게 하라고 말입니다. 결국 그 소장이 제 앞에 와서 사과를 했습니다.
그래서 1986년 신동아화재에 입사하고 창립 이래 최단기간에 차장에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애인이라는 것 때문에 저를 지점장으로 임명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저의 꿈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아서 1996년 제일화재에 입사하고 재일화재 전주지점을 2달 안에 1위로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2년6개월 동안 한번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후 1998년에 강서 지점장으로 발령을 받고 저의 관심과 정성에 직원들이 감동하고 가족들이 감동하고 결국 제일화재 창립 사상 처음으로 3개월 안에 1위로 등극을 시켰습니다. 2001년 재일화재 영업교육부 부장 취임 후 「바다로 간 나무꾼」이란 책을 냈는데 중앙일보의 한 기자가 이 책을 보고 감동하여 신문지상에 실은 후 KBS, SBS, MBC 등에서 저의 인생과 성공담을 담은 프로가 방영되었고 2002년에 해피라이프 개발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복수심을 감사와 은혜로
사실 오래 전에 저를 이렇게 불구로 만든 사람을 알게되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사고 난 장소에서 한 친구를 만나 구멍가게에서 주인 아주머니와 술을 먹으면서 옛날 사고 이야기를 하다가 아주머니가 술김에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범인은 다름 아닌 아래 가게 주인이었고 그 사람과 원수가 되기 싫어서 그냥 못 본 체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나 분해서 그 사람을 찾아가 죽이고 싶었지만 죄를 지은 사람은 역시 벌을 받고 있었습니다. 알코올 중독에 부인은 도망가고 어린 아이들을 구타하고 술 심부름만 시키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에 대한 원망이 있었지만 저의 과거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그 사람에게 편지와 함께 생활비를 8년째 도와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원망심을 감사심으로 그리고 은혜로 바꾸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정말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의 빛을 간직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한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약 정리: 김인식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