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삶 나의 행복 - 봉사인생 40년(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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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삶 나의 행복 - 봉사인생 40년(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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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3.1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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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에 비친 아프리카는 한발, 기근, 아사, 그리고 내전과 국경 분쟁 등 온갖 불행한 사태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비극의 지역이다.
스와질랜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아프리카의 자연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잘 가꾸어진 가로수 아래에서 비질을 하고 있는 흑인의 모습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살갗이 검기에 자연과 더욱 조화롭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옛날 선조 때부터 그 땅에서 평화롭게 살아오던 원주민들의 삶은 백인들이 그 땅을 밟으면서부터 억압당하고 쫓기고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다. 경관이 빼어난 곳에 유난히 큰 저택을 짓고 아름다운 수목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집을 볼 때는 흑인 속에 군림하고 있는 백인을 보는 것 같고, 그 집에서는 백인을 섬기는 흑인의 신음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남아공을 방문했을 때 나는 마치 현장학습을 하는 학생처럼 진지했다. 그곳까지 갔다가 원주민이 살고 있는 블랙 랜드를 가보지 못하면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내원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며 만류했다. 나는 끝내 블랙 랜드를 찾아갔다. 그곳엔 게딱지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무질서하게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울도 담도 없는 매우 좁은 공간에 함석으로 사방 벽과 지붕을 덮고 있었다.
빛도 공기도 통할 수 없는 함석집, 더운 여름엔 바람이 통하지 않아 어떻게 살며, 또 겨울은 어떻게 지낼 수 있을까? 그들의 삶터를 보면서 나는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그 보잘 것 없는 집들은 모두 큰 자물통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그들 모두는 어딘가에서 백인을 위해 고달픈 하루를 보내고 있을 터이다.
1994년 대통령의 암살로 르완다에 내전이 일어났다. 정권을 잡고 있던 후투족이 투치족 반군에 패배했다.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불도저로 구덩이에 파묻는 참혹한 실상이 시시각각 TV 화면을 통해 전해왔다.
그 전쟁터에서는 각종 전염병이 만연해 사람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긴급한 보도도 잇따랐다. 1994년 7월 31일자 강남교당 회보를 보면 다음과 같은 호소문이 나온다.
“르완다에서는 지금 25만 명의 어린이가 죽어 그 시신을 불도저로 밀어 구덩이에 파묻고 있습니다. 또 콜레라 앞에 100만명의 난민이 무방비 상태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기적인 비극의 현장 르완다를 도웁시다. 단돈 500원이면 15명의 르완다 어린이에게 결핵접종을 시킬 수 있고, 그 500원만 있으면 10명에게 디프테리아 예방주사를 놓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살려냅시다.” 르완다 내전이 일어 났을 때, 나는 마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돕기를 서둘렀다. 모금을 시작한 때로부터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에 2361만원을 기탁할 때까지 고작 1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르완다 전 국민은 815만여명이었다. 죽고 탈출하고 이미 질병에 걸린 사람만도 400만명에 이르렀다. 나의 계산으로는 그만큼의 성금이면 살아남은 르완다 국민 모두가 예방주사라도 맞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프리카를 식민 통치하던 열강들은 지리, 역사, 문화, 인종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그들 멋대로 아프리카를 분할시켰다. 그 불합리한 국경선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독립을 한 이들 나라는 그래서 걸핏하면 종족 간에 갈등이 생기고 내전이 일어난다. 르완다를 도왔던 것은 이같은 인식의 바탕에서 약자를 도운 것이다. 그 후 스위스 MRA(도덕재무장)센터에서 르완다의 키갈리 인디펜던트대학 총장을 만났을 때 나는 마치 친지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르완다를 도왔던 애정으로 3000달러를 장학금으로 보냈다. 그 후 전해온 소식은 그 성금으로 몇백 권의 도서를 구입했다며 고마워했다. 그 일 또한 큰 보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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