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행복-봉사인생 40년(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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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행복-봉사인생 40년(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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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5.04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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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청수
히말라야 설산에 세워진 학교를 보기 위해 1993년 8월 라다크를 두번째 방문했다가 나는 우리들의 겨울 헌옷을 설산 사람들에게 모아 보내겠다는 큰 숙제 보따리를 들고 돌아왔다.
북한 동포들에게 컨테이너 9개, 인도에 9개, 캄보디아에 7개 등 제3세계로 떠난 컨테이너 수량은 30 컨테이너에 이른다. ‘그 일을 다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하면서 내 자신이 한 일인데도 믿기지 않는다. 작년에 의약품과 노트로 쓸 수 있는 일기장, 그리고 옷가지를 모아 한 컨테이너를 가득 채워 캄보디아로 보내면서 내 생에 마지막 띄우는 컨테이너가 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 오늘날 물질의 풍요 속에 사는 우리로서는 지구촌 사람들의 극빈상태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가난 때문에 치료도 못 받아보고 죽는 어린이가 매년 1100만명이나 된다고 세계보건기구(WHO)는 밝히고 있다. 또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30억명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가난한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한눈에 훤히 들어오는 그들의 살림살이는 간단한 주방도구와 몇가지의 옷이 쌓인 보따리 정도가 살림의 전부인 것을 알 수 있다. 그처럼 어렵게 살아가는 지구촌 이웃들에게는 30 컨테이너에 담아 보낸 우리의 옷이 참으로 고맙고 귀한 선물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헌 옷 모으기에 지칠 줄 모르고 열정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전쟁 이후 소녀 시절, 미국 구호품을 받아 입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전 처음 받아본 그 구호품은 노란색 줄무늬 블라우스와 헌 양말 한 켤레였다. 나일론의 그 헌 블라우스는 유난히 감촉이 좋아 나는 그것을 즐겨 입었다. 그리고 쉽게 구멍 난 양말을 시도 때도 없이 꿰매 신어야 했던 그 시절, 아무리 신고 신어도 떨어지지 않는 헌 나일론 양말 한 켤레가 나에겐 그렇게도 신기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컨테이너 한 대가 얼마 만큼의 물량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 채 겨울옷 한 컨테이너를 모아 보내겠다고 약속하고 돌아온 나에게, 나라 밖에서 살다 돌아온 교도님들은 헌옷으로 컨테이너 하나를 채우려면 어마어마한 물량이 필요하다고 겁을 줬다. 외국에서 살다 이사올 때는 여러 집 살림을 한데 모아야만 컨테이너 하나를 채울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갑자기 그 크고 넓다는 컨테이너 하나를 어떻게 헌옷으로 가득 채울 것인가 하는 걱정이 생겼다. 그래서 원불교신문에 ‘히말라야 설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겨울 헌옷을 보냅시다’라는 광고부터 냈었다.
옷 모으기를 시작하던 무렵 숙명여자고등학교 안명경(현 숙명여고 교장) 선생님의 어머니 49재 종재식을 우리 교당에서 올렸다. 재식을 마치고 다과를 드는 자리에서 히말라야 설산 라다크 사람들에게 보낼 따뜻한 겨울 헌옷을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를 걱정삼아 했다. 이야기를 듣던 이정자 교장 선생님은 “우리 숙명여고 전교생도 따뜻한 겨울옷을 모아 보죠”라고 했다. 그 분은 “우리 학생들도 더 어려운 사람에게 자신의 옷을 나누어 주는 좋은 체험이 될 것 같은데요”라고 덧붙였다.
어머니의 49재가 인연이 되어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을 위해 옷을 모으게 된 안 선생님은 학생들이 가져 온 옷을 하나하나 점검하여 좋은 것들만 골라 정리하느라 큰 수고를 했다. 나중에는 너무 많은 옷이 쌓여 강남교당 교도님들이 학교에 가서 일손을 거들었다.
그때 한 교도님은 학생들이 가져 온 옷들이 너무 좋아서 집에 딸이 있으면 갖다 입혀 보고 싶은 생각이 들더란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고맙고 좋아서 내 뺨에는 어느덧 따뜻한 눈물 한줄기가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기쁨의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한참 동안 눈물을 실컷 흘리고 났더니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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