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탁 교수의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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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교수의 세상읽기
  • 한울안신문
  • 승인 2005.04.3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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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의는 좋은데 기표가 영~
지난 주말 서울교구 교수회 모임이 있었다. 모임의 성격은 대학생 교화를 어떻게 하면 활성화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관련 토론이 진행되면서 처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달리 점점 어색해 졌다. 원불교 동아리에 소속된 대학생들의 수치가 소개되자 그 수치의 초라함을 보고서 이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의 교수들이 “아니 이럴수가~” 하는 반응들을 보여서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초라한 교화 현황이 대학생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반 교도 교화에 있어서도 특별히 나아졌다는 징후를 발견하기 힘들었다. 이대로 가면 우리 교단에 과거만 있지, 미래도, 아니 현재조차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 날의 자리는 원불교 교화 현황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자성의 자리였다고 하는 것이 나은 표현인 듯 싶다.
한번 다른 사람들이 원불교를 어떻게 생각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자. 우리 원불교 교도를 가장 배려한 말이 아마도 “교리는 좋은데...” 하고 그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는 표현일 것이다. “교리는 좋은데...” 그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는 표현이란 마케팅 관점에서 보면 ‘상품은 좋은데 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사실 ‘좋은’ 상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잘 팔리는 것은 아니다. 상품이 잘 팔리려면 가격도 중요하고, 포장도 중요하고, 광고도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기호의 시대에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옷을 살 때도 싸고 오래 입는 옷을 사는 것이 아니라 돈을 많이 주어서라도 소위 브랜드 옷을 입고자 한다. 옷이 자신의 인품(?)을 말해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식의 기호 소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좋은 옷을 만들어 놓고도 이것을 팔지 못하는 사람은 더욱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반년 전 쯤인가 이화여대 모 철학과 교수가 우리 원불교를 사상적으로 매우 높게 칭송한 책을 출간한 일이 있었다. 한울안신문에서도 이 분의 인터뷰를 게재했는데 그 때 이 분도 원불교 교리는 훌륭할런지 모르지만 막상 교당에 들어서면 1백년 전 쯤으로 후퇴하는 것 같아 ‘아니올시다’라는 인상부터 받는다고 했다. 교당 내부가 오늘날 사람들의 코드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호는 동전의 양면처럼 ‘기의(signified)’와 ‘기표(signifer)’로 구성되어 있다. 종교에서 ‘기의’란 교리이고, ‘기표’란 기의를 전달하는 수많은 수단들이다. 우리 교단은 기의에만 치우친 나머지 기표 개발에 소홀히 한 것이 아닐까. 기의와 기표가 동전의 양면을 구성하듯이 교리와 교화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제부터라도 교리연구 못지않게 교화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성균관대, 원남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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