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봉공의 삶-려타원 김상연 남서울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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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봉공의 삶-려타원 김상연 남서울교당
  • 한울안신문
  • 승인 2006.10.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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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정성으로 4대가 법회출석


“금과옥조 같은 스승님들의 법문으로 정신과 육신의 고달픔을 잊고 살았습니다.”
직장관계로 남서울교당, 목포교당, 광주교당, 동광주교당으로 수라보 맞는 것처럼 교당을 옮기면서도 기도와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는 려타원 김상연교도.
“제 과거의 삶은 수라보를 맞은 것 같았지요. 36세때, 혼자되어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교만심과 함께한 생활은 방랑생활, 유랑생활 그 자체였습니다. 아이들을 친정에 맡기고 전무출신하려고 동산선원에 들어갔다 아이들 때문에 나왔지요. 그때 복잡하고 산란한 마음이 컸습니다. 법신불 사은님과 대종사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이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장 감사한 것은 친정 부모님의 한결같은 기도정성입니다. 어머님의 끊임없는 기도와 무아봉공정신은 나를 놓고 남을 위하고 교법대로 살게 했지요. 그것이 나의 자녀들에게 복이 되었습니다.” 김교도의 자녀 (1남 1녀)는 법안에서 건강하게 성장, 결혼해 바쁜 직장생활 속에서도 어린 자녀와 함께 법회출석, 크고 작은 교당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무아봉공의 삶
“무교였던 며느리, 사위가 앞장서서 사돈댁에 원불교를 홍보하는 것을 보면 참 대견하고 내가 인연복이 있는 사람이다”고 싱글벙글하는 김교도.
“8년간의 은혜호스피스활동과 12년간 병원 간병을 통해 인과응보를 믿고 수행하면서 내가 지은 업장을 소멸시키기 위해 하루 하루를 영원처럼 소중하게 살았다”는 김교도는 요즘 손자 둘 키우는데 여념이 없다.
“37개월 된 혁준과 갓 돌 지난 승찬을 양육하느랴 적성에 맞는 호스피스활동을 제대로 못해 아쉽지만, 원불교 예법을 알아 합장기도하고 목탁치는 모습을 보면 힘든 생활은 어느새 잊는다”고.
“친정 어머니가 나의 두 아이를 바르게 성장시켰습니다. 나 또한 건강이 허락되는 한 손자들을 기도와 정성으로 손자들이 대종사님 법 안에서 자라도록 무아봉공을 할 것입니다.”
묵묵히 무아봉공으로 가정사를 챙기듯이 교당에서도 주무로써 청소와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김교도를 최도인교무는 “법당청소부터 교당의 크고 작은 행사에 참석하여 철저하게 챙기며 무아봉공하는 교도다. 특히 가족교화가 시급한 시점에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손자들이 법회에 출석하고 있어 가족교화의 모델이 되고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5대째 원불교 집안
김교도의 굳은 신심과 공부와 무아봉공 정신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전개되었다. “친가, 외가가 원불교 집안이었습니다. 친할머니는 관촌교당 창립주였고, 이모할머니와 이모가 전무출신이죠. 특히 친정어머니는(신림교당) 법호인으로써 자비심과 공부심이 컸지요. 5대째 일원가족을 이룰 수 있는 것도 친정어머니의 기도와 정성덕분입니다.”
박사시화 할머니 연원으로 전주 경원교당에서 입교 후 정산종사를 친견하면서 유년시절을, 대학교 때에는 전주 경원교당에서 유년부 교사를 했을 정도로 일원교화와 봉사열의가 컸던 그녀는 “일원 법안에서 공부하면서 살 수 있어서 행복하다”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 몸으로 봉공 할 수 밖에 없는 현생이 안타깝다. 다음 생에는 큰 사업하는 사람으로 태어나 교단에 큰 희사하고 싶습니다”고 서원을 밝히기도 했다.
김해인 기자 kms@ wo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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