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호리도 틀림없이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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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호리도 틀림없이 응답
  • 한울안신문
  • 승인 2013.12.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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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감각감상 / 최이석 , (장충교당)

“눈물겨운 삶이 일원대도에 귀의하여 오롯한 신심과 서원 속에 기쁨과 법열로써 승화시키고 육신의 고단함도 봉공보은 일념으로 불태워 한 가정에 머물지 않고 교당과 교단에 바치셨으니 어찌 보람차고 뿌듯하지 아니 하리요.”


이 글은 올 7월 5일, 세수 84세로 열반에 드신 어머니(부타원 양연원)의 회갑식 때 호타원 황영규 교무님께서 보내주신 축하의 메시지였다. 어머님은 종로교당에 다니시던 이묘근 교도의 인도로 원기 50년에 종로교당에 입교하셨다. 성동(현 장충)교당 창립멤버로 참여하여 보은, 봉공, 교화에 모든 것을 바치신 분이셨다. 법회 참석을 생명처럼 아셨으며 서울회관 신축을 위한 천일기도도 무사히 완주하셨다. 후에 마련한 작은 옷가게는 교당 봉공회 물품들로 채워진 잡화점이었다. 이렇게 어머님은 공심으로 일생을 사셨다.


그 응답이라 할까? 진리는 마지막에 전부 답해 주셨다. 상을 당하자 초재부터 6재까지 역대교무님들이 한 분씩 맡아 설법과 추모담도 해주셨다. 종재 때는 장충교당 역대 교무님들과 대전 노은교당, 현 장충교당 교무님들과 한자리에 모여 또 한 번의 축원 독경을 받으시며 가는 축복도 누리셨다. 죽산 서울교구장님과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주신 교무님들께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작년 8월, 가정의 장기 계획으로 세종시로 이사를 했다. 장충교당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어머님을 설득하고, 가족교화를 위해 가까운 대전 노은교당으로 옮기자고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았다. 그건 허락이 아니라 자립이 없던 어머님의 포기였을 것이다. 이사 온 지 10개월 만에 열반을 앞둔 어머님을 보며 가슴이 메어졌다. 그래서 마지막 가시는 길은 어머님이 평생을 다니시며 보은, 봉공, 교화를 하신 장충교당에서, 또 긴 세월 법정을 나누던 교도님들과 함께해 드리고 싶었다.


이제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글을 쓰려고 한다. 돌아가신 아버님을 너무 그리워 하셨는지 7월 5일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한날에 열반에 드셨으며, 기독교식대로 집에서 기도하던 며느리에게 나타나, “나 이제 간다. 아이들 잘 키우고 애들 아빠와 사이좋게 잘 살아라”라는 당부로 마지막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떠나셨다. 나는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과 발자취를 닮고자 다시 장충교당으로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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