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으로 맺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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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으로 맺은 인생
  • 한울안신문
  • 승인 2014.09.2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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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당 지킴이 … 마포교당 박원흥 교도


“그저 무턱대고 좋았지. 교무님이 좋다면 무조건 좋은 줄 알고 쫓아 다녔응게 .”
뭐가 좋아서 오랜 세월 교당을 다녔냐는 질문에 박원흥(마포교당) 교도는 무조건 ‘좋다 좋다’란 말만 되풀이 했다. 진정한 맛은 무미(無味)라 했던가. 다양한 양념에 파묻혀 본연의 맛을 잃어버린 음식이 아니라 재료 그대로가 느껴지는 수수한 맛, 예쁘진 않지만 그릇에 담긴 음식의 모양과 맛을 살려주는 질그릇 같은 모습. 그래서 교도들이 ‘어머니’하며부르는지도 몰랐다.



# 참말로 희한한 꼴을 봤제
“내가 둘째 아들을 잃었어”


박 교도의 얼굴에 저어하는 빛이 보이며 눈물이 살짝 어렸다. “걔가 어렸을 때 울고 앉아 있어. 내가 무심코 신을 던졌더니 새가 죽었다고. 새도 생명인데 내가 죽여서 죄를 지었다 그래. 그래서 그깟 새 한 마리 죽었다고 뭐 그라냐 했제. 그런데 그 아들이 21살 때 차사고로 갑자기 죽었어. 49재를 지내고 집에 가니 웬 새 한마리가 우리 집 현관에 와서 짹짹하며 돌아다녀.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 현관 앞에 죽어있는 거야. 진짜로”
신기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49재를 지낸 날 꿈에 아들이 나타나 임금이 쓰는 왕관을 쓰고는 ‘자기는 잘 간다’고 이야기를 하곤 가더란다. “그렇게 신기한 꼴을 봤지. 참 나, 인과보응의 뚜렷한 이치가 있다고 나에게 깨쳐주느라 그랬나벼.”
박 교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건성나발로 다니니 뚜렷한 신조를 보여줬다는 것. 하지만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올릴라면 올려. 괜찮아.” 기자의 곤혹스러움을 눈치챘는지 박 교도가 담담히 말했다.


# 오막살이 교당
“마포교당 시작이 오막살이였어. 처음에 교무님 오빠네 아들딸 자취하는 방에서 다섯 명이 법회를 봤어. 거기에서 2~3년 하다가 조그만 오막살이 하나 사서 하다가 이 자리를 샀어.”그 오막살이가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기도와 원력과 정성이 모아졌을까. 박원흥 교도는 그때 오막살이 교당을 지켰던 그 마음으로 마포교당 지킴이로 있다. 지금도 일요일이면 한 시간을 넘게 달려 법회 보러 온다는 그. 결석 한 번 안 했다고 교무님께 상으로 받은 단주를 보여주었다. “내 집이 상계야. 그래도 여기 다녀. 그게 안 바꿔지더라고. 한번 정해지면.”



# 달덩이 같으신 정산종사님
박 교도는 정산종사 때부터 총부를 쫓아다녔고 그 덕에 신심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왔다. “정산종사님 참말로 달덩이 같으셨제. 내가 거기에 반해서 다녔어.” 말은 그리해도 기억나는 한 구절을 말해 달라고 하자 “한 울안, 한 이치, 한 집안, 한 권속, 한 일터, 할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 법문이 절로 튀어나온다.
정산종사님에 반해서 다녔다던 20대의 곱디곱던 꽃색시는 이제 아흔을 훌쩍 넘어 교당의 원로로 교도들에게 어머니라고 불리며 교당을 지키고 있다. “살면서 즐거운 날은 법회보는 날이었어. 시집가는 게 별 것이여? 다음 생에는 성불제중하는 전무출신이 되고 싶어.”
이생에도 내생에도 박 원불교인이 되겠다는 교도. 원기100년을 향해 나아가는 원불교의 뚝심이 평생을 신심 하나로 밀어부친 박 교도와 같은 평교도에게서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



이정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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