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도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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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도의 주인
  • 전지만
  • 승인 2001.04.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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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주인은 "참 나"


이산 박정훈 교구장


반갑습니다.
오늘, 가락교당의 회장단 단장 중앙 주무 교화협의회 분과장 봉공회 청운회 여성회 각 단체
장 등 새 임원들이 새 일을 맡으셨습니다. 대종사님 법으로 서울과 나라, 세계, 나아가 온
우주를 광대무량한 낙원세계로 전개할 교당과 회상의 큰 주인이 되셨습니다.
공도의 주인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공도’란 무엇인가?
공이라는 것은 ‘전체’를 뜻합니다. 공의 의미는 시대를 따라 점점 그 범위가 커졌습니다.
가족주의 시대에는 가족이 전체였고, 부족주의 시대에는 부족이었으며, 민족주의 시대에는
민족이 전체였습니다. 대종사님 일원주의 시대의 전체는 우주만유 삼라만상을 다 포함합니
다.
그러면 ‘주인’이란 무엇인가?
대종사님께서는 금강산의 주인되라 하셨고, 정산종사님께서는 마음공부 잘하여서 새세상의
주인되라 하셨으며, 민족의 스승인 도산 안창호 선생께서는 이 나라의 참 주인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 것인가? 하며 주인에 대해 무척 아쉬워하셨습니다. 우리 민족 교육의 지표 또
한 ‘주인정신’에 두고 있습니다. 주인이란 과연 무엇이기에 세가(世家)에서나 도가(道家)
에서나 중요시하는 걸까요?
자전에서 ‘주’자를 찾아보았습니다.
어른 주, 주인 주, 임금 주, 맡을 주, 주장할 주, 신주 주, … 10가지도 넘습니다. 수 만가지
글자 중 가장 으뜸 되는 글자는 주인 주입니다. 네 가지 면에서 주인을 생각해보고자 합니
다.

사랑으로 감싸야 어른
어떤 사람이 어른인가? 어른은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어른입니다. 아버지는 부주(父主) 어
머니는 모주(母主), 스승은 사주(師主), 위대한 인물은 성주(聖主),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
신 성자들은 구세주(救世主)라고 합니다. 꼭 그 역할을 하는 분에게만 붙일 수 있는 것이 주
(主)자입니다.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는 하나가 되어야 하고, 심경이 번져있어야 합니다. 세
계, 우주에 모두 심경이 번져있어 같이 즐겁고 같이 괴로워합니다. 또 넓으면서도 한없이 깊
이가 느껴져야 합니다. 우주 만유를 내 몸과 똑같이 느껴야 공자의 인을 실천하는 것이요,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부처님의 자비, 대종사님의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또 어른이란 어떤 분인가? 용서하는 사람이 어른입니다. 나이가 젊고 어려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한다면 훌륭한 어른의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어른은, 부드러운 것으로써 이기는 분이 어른입니다. 사람의 얼굴 중에서 제일 강강하고 굳
센 것은 치아요, 가장 부드러운 것은 혀 입니다. 그런데, 환갑의 나이가 되어서 보면 가장
많이 상한 것이 이빨입니다. 100수를 살고 가신 분도 혀에 이상이 있어 돌아가신 분은 못
봤습니다. 세상에 안과의사 치과의사 등등 많은 의사가 있지만 혀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는
없습니다. 부드럽기 때문에 쉽게 고장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굳센 사람은 부드
러운 사람입니다.
정산종사님께서 가위 바위 보에 대해 해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가위는 호남 영남, 공산주
의 민주주의가 대립하듯 자르고 나누어 이기려고 하는 것이요, 바위는 완력으로 누르려 하
는 것이다. 앞으로 돌아오는 세상은 보(보자기)의 시대요, 우주만유 삼라만상을 감싸 안는
시대다. 부처님, 공자님, 예수님의 힘을 감당할만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분들은 우주만유
삼라만상을 다 부드럽게 감싸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주인은 ‘참 나’
주인이 되어 맡은 바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주권을 확보해야 합니다. 주체의식을 가져야 합
니다. 그러면 ‘나’란 누구인가 생각해봅시다.
옛날 얘기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어떤 노인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어떤고 하
니, 희끗희끗한 머리가 반도 넘게 벗겨져 뒤쪽에 몇 가닥 남은 머리를 모아 콩알만하게 상
투를 틀었습니다. 콩알만한 상투를 달랑달랑 흔들며 길을 가다가 반들반들하게 머리를 민
스님 한 분을 길동무로 만났습니다. 둘이서 재미있게 얘기를 나누며 길을 가다가 저녁이 되
어 여관방에 묵게되었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스님이 호롱불을 켜고 예불을 올리고서 보니,
어제 저녁에 만난 노인이 잠을 자는데, 코를 골 때마다 조그마한 상투가 바들바들 떨리는
모습이 우스워 장난삼아 상투를 싹둑 자르고는 먼저 길을 떠났습니다. 노인이 잠에서 깨어
보니, 스님이 온데 간데 없어 여기저기 스님을 찾아 다녔는데, 머리 위가 허전해서 만져보니
상투는 없고 스님머리처럼 반들반들했습니다. 그러자 이 노인이 “스님은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갔을까?”했답니다.
이게 무슨 얘기인가 하면, 그 노인에게는 상투가 바로 ‘나’였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나’로 여기고 또 어떤 사람은 권리가 ‘나’인줄 압
니다. 돈이 있으면 신이 나고 없으면 시무룩해 하고, 권리를 얻으면 기세등등하고 선거에 떨
어지면 기가 죽습니다. 이런 것들은 전부 ‘참 나’가 아닙니다.
상투 명예 돈 등을 전부 놓고, 놓았다고 하는 것도 놓아 허공처럼 텅 빈 마음일 때 그것이
바로 ‘참 나’입니다. 나를 아는 사람은 주인의식이 바로 선 사람입니다.
9인 선진님들께서는 허공법계에 기도를 올려 시방세계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어디에 가서
법을 펴더라도 제지하고 막는 사람 없이 모든 사람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왜냐? 대종사님께
서는 시방세계의 소유권을 확보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일까요? 아는 사람이 주인입니다. 알기 위해서는 대소사를 막론하고 배워
야 합니다. 그러면, 배우는 것으로 다 해결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보고, 들을 때, 유심히
보고 유심히 들어서 그 안에서 알음알이를 얻고 인생철학을 터득해야 합니다.
백범 김구 선생께서 상해에 계실 때입니다. 큰 일을 함께 해낼 동지가 필요한데, 어떻게 해
야 만날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하던 중 목수 여럿이 작업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상해에 있는 한국인들은 일본인에게 잡혀갈까봐 한국인 행세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십
수명 목수가 못을 박는데, 못 박는 소리가 전부 ‘탕 탕 탕’하고 나는데 한 사람만이 ‘턱
턱 턱’하고 났습니다. 바로 한국인 목수의 솜씨였습니다. 백범선생이 그 목수를 조용히 불
러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으니, 아니나 다를까 한국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름을 물
으니 윤봉길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백범 선생은 그날 저녁 윤봉길 의사를 교육시켜 일본인
육군대장을 비롯한 많은 일인(日人)을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 장개석 총통은
“중국 4억 민중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한국의 한 의사가 해냈다”고 평했습니다. 김구 선생
은 석사나 박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못 박는 사람들까지도 유심히 보았다가 결국 나라와 민
족을 구할 인재를 찾아 활용한 것입니다. 보통사람의 안목과 꿈이 있는 사람의 안목은 다르
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일까요? 깨달아야 주인입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경허스님과 만공스님
이 함께 시주를 받으러 다니고 있었습니다. 경허스님은 바라의 쌀을 만공스님에게 털어 붓
고는 혼자서 털털거리며 앞서 가고 있었습니다. 만공스님은 속으로 아무리 스승이지만 너무
하다 싶어하며 불만을 갖고 땀을 흘리며 쫓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허스님이 길을 가
다가 물동이를 이고 오는 예쁘장한 아낙네에게 덥썩 입을 맞추고는 휙 가버렸습니다. 아낙
네가 마을 청년들에게 이러저러한 일을 당했다고 하니, 마을 청년들이 그 스님을 찾으러 나
무막대기를 들고 우르르 쫓아왔습니다. 뒤 처져 가던 만공스님은 혹 자기가 몰매를 맞을까
봐 죽기살기로 뛰어서 경허스님 계신 곳까지 도망갔습니다. 앉아있던 경허스님이 말하길
“무거운 짐을 지고 어찌 왔는고?”하니 만공스님이 “무겁고 가볍고가 어디있습니까? 죽
기살기로 왔지요”했습니다. 팔만대장경의 요지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보통사람
들은 평생을 수행해도 깨닫기 어려운 것인데, 경허스님은 아낙네에게 입 한 번 맞추고 제자
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이렇듯 배우고 보고 듣고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일까요? 일거리가 보여야 주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집안을 어지럽히고도
치울 줄 모릅니다. 마음이 없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이것도 치우고 저것도 치우고,
또 교당에 와서도 이 일도 해야하고 저 일도 해야하고 온통 해야 할 일들만 눈에 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일까요? 책임감 있는 분이 주인입니다. 우자천려(愚者千慮)에 필유일득(必
有一得)이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찌할꼬 어찌할꼬 하지 않는 자는 나도 어찌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 천국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
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법신불 사은의 뜻대로 하는 사람이 극락을 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일까요? 앞장서는 사람이 주인입니다. 어려운 일을 할 때 더더욱 내가 앞
장서야 합니다. 여관에 불이 났습니다. 부지런히 짐 챙겨 뛰어나가는 사람은 손님이요, 이것
저것 구해내고자 불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은 주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일까요? 아쉬운 입장에 서는 사람이 주인입니다. 배짱 세우는 사람이 주인
이 아니라 아쉬워하는 사람이 주인입니다. 데모를 해도 적당히 하고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알아야 주인 정신을 가진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어른이 아쉬워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걱정,
저런 걱정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쉬움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아쉬워하는 사람이 주인입니
다.

흔적없이 거느려야
세정을 알고 평등하게 똑같이 아끼고 사랑해야 거느릴 수 있습니다. 조만식 선생께서는
“고향을 묻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충청도냐 전라도냐 하면서부터 골이 생깁니다. 다 같은
한국사람으로 족할 것이지 고향을 물어 굳이 나누지 말라 하셨습니다.
또 어느 독립운동가는 유언하길, “내 비석에는 비명을 적지 말고 눈을 두 개 새겨라. 한 눈
으로는 일본이 망하는 것을 볼 것이요, 다른 한눈으로는 대한의 독립을 지켜볼 것이다”했
습니다.
잘 통솔하려면 흔적이 없어야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상이 있으면 안 됩니다.
지구는 시속 1670km로 회전을 합니다. 고속버스가 달리는 속도의 열 배도 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지럽습니까? 그렇게 빨리 도는데 우리는 움직이는지 조차 알지 못합니다. 큰 주인,
큰 지도자일수록 모르게 일을 해나갑니다.

하늘같이 신주같이 받들어야
주인이 주인으로서 제 역할을 하면 하늘같이 높이고 신주같이 받들어야 합니다. 어느집 대
감마님이 있었는데, 하루는 “비가 부슬부슬 와서 들일을 못할 것 같으니 오늘은 들일 대신
새끼를 꼬는 일을 하라”고 시키고는 외출했습니다. 모처럼 비가 와서 하루를 실컷 놀 줄
알았던 하인들은 내심 투덜투덜 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불평을 하다가 그냥 잠만 잤습니
다. 또 한 명은 자다가 깨서는 새끼를 두어줄 꼬았습니다. 다른 한 명은 묵묵하게 새끼를 꼬
았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돌아온 대감은 하인들에게 각자 새끼줄 꼰 만큼 엽전을 꿰어 가라고 했습니
다. 잠만 잔 하인은 한 닙도 못 가져갔고, 자다 깨서 두 줄이라도 꿴 하인은 그만큼의 엽전
을 가져가고 조금은 바보스럽게 줄곧 새끼를 꼰 하인은 혼자서는 모자라 가족까지 불러서
엽전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우주만유, 나 아닌 다른 사람 모두가 나의 시험관(試驗官)입니다.
복 받을 일을 하면 소소영령한 진리가 호리도 틀림없이 복을 줍니다. 주인으로서 주인 역할
만 제대로 해내면 부처님, 하느님께서 다 복을 주십니다.
가락교당의 ‘가락’이라는 글자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옳을 가(可) 자에 즐거울 락(樂)
자입니다. ‘옳은 낙’, 곧 ‘정당한 낙’이니 이곳이 바로 극락이고 천당이라는 뜻입니다.
가락교당 교도님들은 ‘내 교당 교도들끼리만 극락과 천당에 갈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
국가 세계와 함께 가길 염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이덕원 기자>

딸꾹질은 ‘횡격막경련증’으로 목에서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딸꾹’ 소리가 연이어 나
는 증상을 말한다. 한의학에서는 애역(口厄逆) 또는 얼(口歲)이라 하는데, 일단 발병하면 흉
격에서 기가 거슬러 올라 발작시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며 소리는 짧고 빈번하여 스스로 자
제하기 힘든 것이 특징이다. 심한 경우 딸꾹질이 나와서 대화도 할 수 없고 음식을 씹기도
힘들며, 숨쉬기도 잠을 잘 자기도 어렵다. 때로는 수술 후나 일부 위독한 질병의 말기에 나
타나기도 한다.
한의학에서는 딸꾹질의 원인을 일반적으로 위기(胃氣)의 상역(上逆)으로 본다. 예를 들면 음
식을 입에서 충분히 씹지 않고 날 음식이나 찬 음식으로 삼키게 되면 위장의 온기와 외부
의 찬 기운이 충돌하여 횡경막을 자극함으로써 발하기도 하고, 너무 맵거나 뜨거운 음식을
자주 즐기면 중초에 열기가 축적되어 위기의 순환계통이 상역하여 발하게 된다. 또한 우울
하여 오래되면 화로 변해 간화가 위를 범하고 위기가 상역하게 되는데 이것이 딸꾹질 발생
을 초래할 수 있다. 이상 상황에서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면 병을 초래하여 증상을 나타
내며, 임상에서 일부는 몸이 허약하고 정기가 쇠약해 장부기능에 이상이 생겼을 때 청기(淸
氣)가 오르지 못하고 탁기(濁氣)가 내려지 못해 청탁이 침범하여 위기(胃氣)를 손상시켰을
때 발병하기도 한다.
증상이 가벼운 경우에는 풀과 같은 가벼운 것으로 콧속을 자극하여 재채기를 하게 한다. 또
는 코를 막고 입을 다문 뒤 기운을 단전에 주하고 호흡을 멈추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상역
한 위기를 억제·하행시켜 딸꾹질이 멎는다. 또한 따뜻한 물이나 꿀물을 마시는 것도 한 방
법이 된다. 특히 꿀물은 횡격막의 경련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으므로 위기의 긴장으로
발병된 경우에는 이 방법이 효과적이다.
딸꾹질이 심한 경우 보통 ‘정향시체탕’, ‘곽향정기산’을 주로 사용한다. 이중 정향시체
탕은 괴엄꼭지를 사용하는데 괴엄꼭지가 귀하면 감꼭지나 곶감꼭지를 이용하기도 한다. 여
기에서 감이나 괴엄꼭지를 이용하는 것은 감에 떫은 맛이 있어서 수렴작용이 강하므로 횡경
막의 경련에 일정한 효능이 있을 것으로 보며, 초기 증상에는 감꼭지 한가지만 달여 마시기
도 한다.
침구로 치료하고자 할 때는 허실을 분별해 허하면 보하고 실하면 사한다. 실증은 치료가 쉬
우나 허증은 치료가 힘들다. 보통의 침구치료는 수태음폐경의 척택, 열결 등의 혈을 취하여
보법으로 폐가 기를 주관하는 것을 강화하고, 족소음신경의 태계, 부류 등 혈위를 취하여 사
법으로 신(腎)의 사기를 사하여 사기가 뭉친 것을 풀어준다. 이와 동시에 내관(內關)을 취하
여 흉격을 열어주고 공손(公孫)으로 비위를 조리하며 족삼리(足三里)로 기의 거스름을 가라
앉게 하여 부정거사하게 한다. 증상에 따라 복부의 중완이나 등쪽에 있는 양측의 격수혈, 귀
뒤의 예풍혈 함께 또는 각기 사용하기도 한다.
딸꾹질이 일단 멈춘 후에는 변증하여 원인을 찾아 적절한 보사법을 응용하면 근본 치료를
할 수 있다. 귀에 있는 이침혈도 효과적이다. 이침혈은 지애점(止口厄點)에 자극을 가하는
것인데, 지애점은 이륜각내의 위점과 대이륜에 있는 흉척간의 중간점으로 이 부위를 엄지
손가락으로 2-3분 정도 눌러주면 보통의 딸꾹질은 즉각 멈추며 심한 것도 체침의 혈과 병
행하여 수회 반복하면 효과가 있다.

문) 대종사님께서는 현실을 파란고해로 비유하셨는데, 고해에서 벗어나 낙원생활 할 수 있
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답) 사람이 세상에 나와 살면서 누구나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
은 바로 괴로움과 즐거움일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싫어하는 고(苦)는 오지않고 좋아하는
낙(樂)이 오기를 바라고 살지만 어찌 우리생활에 苦없이 樂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범부 중생은 때로는 행복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모두가 고통을 겪으면서 살게 됩니다. 따라
서 우리 생활에 늘 즐거움만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좀 지나친 바램이며 현실적으로 이루어
지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즐거움이란 것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딱 부러지게
“이것이다”라고 말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도 영원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
러므로 우리의 인생살이에는 고와 락이 언제나 함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
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나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믿고, 인과보응이 틀림없으며, 죄복인과는 사은이 주재한다는
일원상의 진리를 철저히 믿고 진리불공과 실지불공을 정성껏 해야겠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진리의 종교적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 일상생활에서 하나하
나 실천해 나가야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을 구별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얻게 됩니다.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의 그 마음, 누구도 가져갈 수 없고 내가 언제나 찾아 쓸 수 있는 그
마음이 나에게 항상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경계에 넘어져도 좌절하지 말고 일어나고 또 일
어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앞에 늘 즐거운 일만 생길 수는 없지만 늘 즐겁
게 살 수는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 그 때 그 일을 법대로 하고 괴로운 일
을 당해도 그 괴로움을 극복해서 즐겁게 하면 상승 작용을 맞게 되어 오히려 괴로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바라다 봤을 때 “지금 이
보다 더 좋은 때가 있겠는가”하며 즐겁게 사는 생활 태도로써 지혜로운 삶이 되도록 노력
하며 살다보면 결국 우리 모두가 바라는 극락생활을 세세생생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성불제
중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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