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상 서원문을 통한 마음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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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 서원문을 통한 마음공부
  • 전재만
  • 승인 2001.12.2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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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포교당 심정수 교무


유상으로 보면 상주불멸로 여여자연하여 무량세계를 전개하였고
일원상의 진리는 늘 있는 것으로 본다면 상주불멸이다. 상주불멸이란 늘 있어서 없어지지 않는다. 즉 불생불멸의 진리(마음)작용을 뜻한다. 그래서 여여자연이다. 없어지지 않아 한결같이 있으니 그 자체가 무량세계 전개이다. 헤아릴 수 없는 세계를 전개한다는 뜻이다. 내 마음이 없어질 때가 있던가? 알고 보면 눈 깜작할 순간도 마음이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 ‘유상으로 보면’이란, 마음이 영원불멸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진리의 숨은(隱) 면이다.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으로 경계가 있기 전의 마음 모습이다. 경계가 없다고 해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상으로 보면 우주의 성주괴공과 만물의 생노병사와 사생의 심신작용에 따라
이것은 진리의 나타난 면이다. ‘무상으로 보면’이란? 변하는 것, 나타난 면으로 본다는 뜻이다. 경계따라 나타난 것은 성주괴공 생노병사 춘하추동으로 변한다. 마음도 경계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지지 않던가? 그러니 변하는 것이다. 즉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만물은 생노병사로 천지는 춘하추동으로 변화하는데 세월의 장단이 있을 뿐 원리는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변의품 4, 7장 참조 바람)
‘사생의 심신작용(胎卵濕化)에 따라’ 이 말씀도 같은 내용이다. 경계따라 생겨 이루어진 마음(成 春), 그 마음이 머물면서 여물어가니(住 夏)이며, 그 마음 헤아려서 원인 찾으니 경계(감정)가 사라져간다(壞 秋), 원인을 찾아 해결하니 경계가 없어졌다(空 冬)이다. 그리고 ‘사생의 심신작용 따라’라고 하셨는데, 마음의 흐름을 살펴보면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고 변화하고 있다. 이것이 진리인데 사람들은 이러한 마음을 변덕스럽다고 한다. 이것은 마음의 변화하는 이치를 못느껴서 그런 것이다. 이 변하는 진리를 대종사님께서는 ‘무상으로 보면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만물은 생노병사로, 천지는 춘하추동, 마음은 경계따라 변한다’고 일원상 서원문에 일러 주시면서 그 경계로 공부하라고 당부하셨다.
육도로 변화를 시켜 혹은 진급으로 무량세계를 전개하였나니
육도란 천도 인도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을 말한다. 우리의 생활 자체가 육도세계이다. 그래서 대종사님은 ‘천당과 지옥이 내 마음에 있다’고 하셨다. 내 마음의 그 육도가 그대로 나타난 것이 현실세계다. 그래서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라고 한다. 그 경계 따라서 진급 강급 은생어해 해생어은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심신작용 따라(경계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킨 것이다. 그 변함이 한없이 돌고돌면서 끝없이 펼쳐지니 무량세계로의 전개이다. 이 무량세계전개라는 것은 경계따라 가지가지로 내 마음의 세계가 나타남을 말한다. 그리고 현실에 펼쳐진 각양각색 천태만상으로 나타난 현상세계도 무량세계의 전개다.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 받아서
일원상 서원문은 대종사님께서 직접 지으신 경이다. 우리 어리석은 중생에는 대종사님도 포함된 우리 모두이다. 그런데 왜 대종사님 당신도 포함시켰을까?
겸손하셔서 일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물론 그렇기도 하시겠지만 변의품 39장의 말씀이 떠오른다. ‘불퇴전에 오르신 부처님께서도 공부심이 여전히 계속되어야 어떠한 순역경계와 천마의도라도 그 마음을 물러나게 못할지니 이것이 이른바 불퇴전이니라’고 밝혀 주셨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 ‘당신도 포함시키셨구나’함이 느껴진다. 그러므로 대종사님의 서원문이며 우리들의 서원문인 동시에 나의 서원문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중생이라고 하셨을까? 곧 일 당해서 경계임을 모르면 어리석은 중생일 수밖에 없으니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 받아서’중 법신불 일원상이란 그 때의 그 경계로 일어난(있어진) 그 마음을 말한다. 일원상이란 내 마음이 경계따라 드러나는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체 받아서’라는 것은 경계따라 일어난 그 마음을 ‘경계구나!’하고 공부할 때인 줄 알라는 것이다. 마음을 순간 포착 해야 한다.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를 하며
수호란 몸과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정신 수양공부이다. (힘을 기르는 공부) ‘경계구나’라고 느끼는 자체가 마음을 지키는 공부다. 마음이 경계따라 흘러가지 않도록 지켜야 힘이 길러진다. 대산 종사님께서 부촉하신 마음의 검문소설치, 멈추는 공부, 참는 공부가 다 수호하는 것이다. 마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경계따라 마음이 일어나면 몸도 동한다. 그것이 심신 작용이다. 그래서 심신작용 따라다. 이 작용하는 심신을 잘 지키라는 것이며 그것이 순간포착이며 정신수양 공부다. 대종사님께서 마음은 지극히 미묘하여 잡으면 있어지고 놓으면 없어진다고 하셨다. 마음을 잡는다는 뜻은 경계임을 알아서 ‘그래, 공부할 때구나! 내(마음)가 지금 미워(욕심,짜증)하고 있구나!’하고 바로 알라는 것이다. 그것이 심신 수호하는 공부다.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를 하며
사리란 일과 이치이다. 일과 이치는 하나다. 일에는 이치가 따른다. 그 일의 이치를 잘 헤아림이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이다. 경계따라 나타난 마음을 알아 차렸으면 왜 이런 마음이 나왔을까? 상대는 나에게 왜 그랬지? 라며 헤아려 보아야한다. 이렇게 헤아려 보아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찾고 나면 나의 요란함도 이해가 되고 상대의 그러함도 이해가 된다.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진리다. 이유가 없다는 것은 마음이 요란하여 원인을 못 찾았거나 혹은 물 흐르듯이 무심히 지나쳤을 따름이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찾아야 혜두단련이 된다. 그것이 또한 속 깊은 마음공부인 것이다. 그 원인을 헤아리기도 전에 따지고 부딛치면 나와 상대의 도심만 상하게 될 뿐 아무런 이익이 없다. 그래서 경계가 오면 공부할 때가 왔음을 마음에 잊지 말라고 하셨다. 이것이 경계에서 그 마음으로 지혜단련하여 사리연구하는 공부다. ‘원만하게’란 ‘다, 모두, 빠짐없이, 두루두루, 속깊이’의 뜻으로 마음을 그렇게 살피라는 것이다.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여
우리의 공부교과서는 마음이다. 따라서 경계따라 일어난 갖가지의 마음은 잘 풀어야 할 응용문제다. 그래서 대종사께서는 응용(일 당해서)하는데 온전한(경계구나. 정신수양) 생각으로(이 마음 어디서 나왔지? 사리연구) 옳지, 나는 그래서 그 마음이 나왔구나, 상대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이것이 진리적 종교의 신앙)취사하기를 주의(경계를 잊지 않고 챙기는 마음)할 것이요’라고 하셨다. 응용문제를 잘 풀어야 유능한 학생이듯이 내 마음에서 일어난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하는데 그 문제 풀고나면 원인은 나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그 상대방을 대할 때 편안하다. 이것이 곧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다. 즉 작업취사다. 그리고 지성으로 하라고 하셨다. 이 지성이란 챙기고 또 챙기고’다. 마음이란 형체가 없어서 챙겨야 느껴진다. 그 챙김의 반복훈련이 지성(至誠)이다.
이것이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다. 정성이 하늘에 닿을 때까지이다. 즉 일백골절이 사무치도록 해야한다. 그래서 대산종사님은 ‘한번에서 열번 또 다시 열번 억만번 무량번하라’고 당부하셨다. 이 얼마나 간절하고 사무친 말씀인가! 무량번이란 무량경계인데 공부하면 무량지혜를 얻는다.
진급이 되고 은혜는 입을지언정, 강급이 되고 해독은 입지 아니하기로써
진급이란 나아짐, 깨우침을 뜻한다. 일을 당해서 경계임을 알 때 내 마음(감정)이 깨우침을 얻어 다스려진다. 다스려진 그 자체가 진급이다. 겸하여 은혜를 입은 것이다. 그러니 강급과 해독은 없다. 그러나 경계임을 모르면 감정에 끌려서 강급되고 해독을 입게 된다. 그러면 누가 나를 좋아하겠는가. 그러니 강급이요, 해독을 입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경계인 줄 알아야 강급도 안되고 해독도 입지 않는 것이다.
일원의 위력을 얻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도록 까지 서원함
상대방의 행동이 눈에 거슬린다. 이 때 흉을 보며 찌푸릴 것이 아니라 경계구나! 내 마음이 찌푸리고 있구나(정신수양)공부할 때구나 이 마음이 왜 나왔을까?(사리연구) 그래 내 맘과 같지 않으니 찌푸려지는구나, 내 욕심이구나, 나처럼 하라고 요구하고 있구나 모든 것은 특성이 있는 것인데!라며 마음보고 해결하고 나면 찌푸림이 없어진다.(작업취사) 그리고 마음의 하는 짓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생긋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이 웃음이 곧 위력이다. 위력이란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어디선가 보내주는 것이 아니다. 그 경계에서 내 마음이 커 가는 힘이 위력인 것이다. 따라서 웃음이 나온 것은 상대방의 행동이 이해가 되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이다.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나와 상대(너)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가 된 것이 곧 체성에 합한 것이다. 곧 상대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로 통해서 합해졌다는 뜻이다. 너와 내가 하나이다. ‘~까지 서원함’이라는 뜻은 그 경계에서 일어난 그 마음이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상대도 편안하고 나도 편안한 마음으로 해결될 때까지 공을 들이라는 것이다. 내가 불편하면 상대도 불편한 것이 정한 이치이다. 곧 마음공부는 내가 편하기 위해서 꼭 해야 한다.
<정리 전재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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