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로 천여래 만보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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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로 천여래 만보살 되자
  • 전재만
  • 승인 2002.07.1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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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최희공 원무


마음 작용하는 공부
지난 시간에 마음공부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이 마음공부란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마음이 잘 작용하게 하자는 것이요, 마음 작용하는 공부. 다음은 그 마음을 잘 사용하자는 것이요, 마음을 잘 푸는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48년간 설법을 하셨는데 그 내용의 요지를 요약해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일체 유심조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마음이 작용하는바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종사님은 28년간 무량법문을 하시고 가셨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대산종사님이 말씀하셨듯 ‘그 마음을 잘 활용하라’ 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 마음 일체유심조를 찾고 원리를 찾는데 집중되어 왔지만, 미래의 시대에는 그 마음을 찾는 공부뿐만 아니라. 그 마음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 공부한 가치가 어디서 드러나겠는가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그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는데 다스리는 공부가 마음작용하는 공부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잘 다스려서 그 다음은 잘 쓰자는 것이 마음공부의 요지가 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작용을 잘 살피자
지난 시간에는 어떻게 마음을 잘 다스리는가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그 마음 작용하는 요지는 공부라는 것이 어려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간단하고, 쉽고, 가까이 있는데 우리는 어렵고, 멀리 있다고 느낍니다. 우리 마음을 잘 작용하려면 내가 내 마음을 살펴야합니다. 항상 내 마음이 작용할 때마다 그 마음작용을 잘 살펴야합니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 공부의 요지를 “대체로는 날로 한번씩 살피고, 세밀하게는 경계를 대할 때마다 잘 살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계를 대할 때마다 내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마음을 화를 내면 안 된다는 식으로 자신을 억누르려합니다. 대종사님은 경계를 대할 때마다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 마음이 경계를 대할 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왔고, 내 마음은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경계를 대할 때마다 공부할때가 왔구나하고 자기 마음을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상대가 싫은 소리를 할 때 화를 내지 말아야지하지 말고, 상대가 그렇게 말할 때 내 마음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살피자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살펴서 노트에 적으십시오. 그 마음 일어난 것을 기재하는 습관을 가져야합니다. 이것이 마음공부의 첫째입니다.
살펴보고 그 다음은 내 마음작용을 법문에 대조해보자는 것입니다. 내 마음작용이 바로 법과 같은가 다른가를 대조해보아야 합니다. 진리와 같은가 아닌가를 어떻게 알까요? 바로 교전에 대조해보는 것이 곧 진리입니다. 이것을 대종사님이 간단하게 일상수행의 요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작용이 일어날 때마다 대조해 보아야합니다. 9가지로만 대조해보면 삼학팔조, 사은사요가 다 들어있습니다. 대종사님이 일상수행의 요법을 1년간 연마하시고 내놓으시며 “과거에는 어렵게 가르쳤지만 이제부터는 쉽게 연마를 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마음을 잘 살피고 일상수행의 요법에 대조해보고, 조금 더 공부하면 솔성요론에 대조해보고, 무시선법에 대조해보고, 마음공부가 익어가면 정전전체에 대조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일상수행의 요법에 대조해보는 공부를 해야합니다. 그래서 잘 살피는 공부, 잘 대조하는 공부를 하자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공부란 것이 너무나 간단하지만, 우리가 법문을 들을 때 마음으로 가슴으로 그 뜻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공부입니다. 마음으로 새겨듣지 않으면 마음공부가 아닙니다. 우리 교법이라는 것은 머리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이요, 마음으로 듣는 것은 그 뜻을 새겨서 그 참뜻이 무엇인가라는 원리를 가슴으로 듣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새기면 절대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법문을 들을 때 마음으로 새겨들어야 합니다. 내 공부, 내 경계를 대조하면서 마음에 새겨들으면 마음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이것 하나만 실천해 보십시오.

보은 그 자체가 마음공부
여기서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이렇게 잘 새겨듣고 자기 마음을 잘 살폈다할지라도 마치 농부가 농사를 열심히 짓고 열매가 충실하게 익었지만 추수를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마지막의 결실이 중요합니다. 추수를 했더라도 쌀을 곳간에 넣고 잘 활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추수한 내용을 잘 활용해서 널리 베풀어 결복을 해야합니다. 결실다음에 결복입니다. 농사를 지은 다음에는 결실을 얻어야 하고, 결실을 얻은 다음에는 효과를 나투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공부라는 것은 아무리 중간에 잘 했다할지라도 마지막에 그 마음을 잘 사용해서 그 은혜가 주위에 나타나지 않으면 곳간에 두고 썩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잘 사용해서 은혜를 나투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에 결실을 해서 결복까지 해야 마음공부를 잘 하는 것입니다. 마음공부의 마지막은 그 공부의 실효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여기에다가 우리가 생각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첫째는 마음을 잘 살펴서 대조하고 새겨라. 마지막에 어떻게 하면 공부의 결실이 나타나느냐는 경전에 나타나 있습니다. 공부를 무시로 대조해서 실행에 옮김으로써 그 공부의 실효과를 보자는 것이라고 아주 정확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공부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실효과에 대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이것을 대산종사님께서 “실효과라는 것은 보은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우리가 보은을 하면 실효과가 나타나는데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고 마지막에 보은을 하지 않으면 추수를 하고 곶간에 쌓아놓기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농사를 왜 지었나라고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보은일심, 일심보은이 실효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음공부의 핵심입니다. 보은 그 자체가 마음공부입니다. 보은이라는 것은 마음공부의 결실입니다. 그 동안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요란하고 어리석기도 하고 그랬죠. 그렇지만 마지막에 잘 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공부의 마지막 결실과 결복을 하는 주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더 공부를 열심히 하자는 것입니다.

공부결실은 유념공부에서
오늘은 어떻게 그 결실을 풍성하게 거두어서 결복을 잘 할 것이요, 그 은혜가 세상에 드러날 것이요, 그 공부의 효과가 이 세상에 드러날 것인가하는데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거기에 대해서 대종사님께서 유념공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공부결실은 유념공부에서 옵니다. 정전에서는 유념공부를 주의, 조행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에 있는데 11과목의 결실인 것입니다. 염불, 좌선, 의두, 성리 등을 해서 마지막 이 주의, 조행을 하지 않으면 허사가 됩니다. 주의, 조행이 바로 유념공부입니다. 대종사님은 이 유념공부를 핵심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순사한테 붙들려서 자신이 유념공부를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형을 감해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유념공부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일기를 쓰라고 했는데 자기 부인이 싫은 소리를 했다고 마음이 요란해졌다며 ‘무념’이라고 썼어요. 일상수행의 요법 1조를 무념했다라고 적었어요.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이 요란해졌다고, 어리석었다고 무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념은 자기가 먼저 생각하고 ‘하자는 조목’과 ‘말자는 조목’을 미리 생각을 해두고 마음이 요란해질 때 교전을 읽어야겠다, 염불을 해야겠다는 등의 계획을 세워놓고, 또 하지 말자는 조목을 정해놓고 그 다음에 경계를 당했을 때 자신의 하자는 조목대로 했다면 유념이 되는 거에요. 하자는대로 하지 않았을 때가 무념인 것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유념도 무념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공부를 모르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이 요란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자는 조목을 정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자는 조목을 노트에 적자는 것입니다. 교전 쓰는 노트뿐만 아니라 다른 노트에 하자는 조목과 말자는 조목을 적어야 합니다. 그래서 실행에 옮김으로써 마음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념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방향을 잘못 잡으면 공부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경계를 당해서 그 마음이 작용할 때마다 하자는 대로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려고 했다면 유념이라고 대종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안되어도 괜찮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하려고 한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이렇게 해야 합니다.
처음엔 이렇게 하며 공부가 10년 20년 익어가면 하자는 대로 하기만 하면 안됩니다. 이렇게 자기 공부가 자기에 따라 느껴지는 것입니다. 항상 그 생각만 가지고 똑같으면 유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항상 더 나은 향상된 모습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성공할 수 있도록 유념을 잘 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유념은 수없이 많습니다. 이것도 하자 저것도 하자 등 참 많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자는 조목으로 잡아야 할까요? 마음의 심계를 정하고 하자는 조목과 말자는 조목을 잡죠. 이것은 범하지 말자는 것이죠. 바로 ‘경계를 대할 때마다 잘 살펴보자’를 하자는 조목으로 잡아야 합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선 이것을 목표로 시작해야 합니다.

상시응용과 연마
두 번째는 상시응용을 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저녁이 되어 남은 시간이나 새벽에 정신을 수양하기 위해서 ‘염불좌선을 하기를 주의하라’를 하자는 조목으로 잡아서 꼭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을 하기 전에 응용의 형태를 보아 미리 연마하기를 주의할 것을 잡아야 합니다. 원불교의 마음공부의 핵심은 사리연구를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그 응용의 형태를 그 일이 어떻게 될까, 어떻게 처리할까하는 연마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 세 번 생각해서 일 처리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리연구공부인 것입니다. 그 다음은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자입니다. 옳은 일은 용감하게 실행으로 옮기고, 그르다고 생각하면 용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일을 하기 전에 응용의 형태를 미리 연마하기를 주의하고, 일을 당하면 일단 멈추어서 온전한 생각으로 옳은 일은 용감히 실행하고 그르면 용감히 버리는 수행공부를 하자는 것입니다. 일을 마친 뒤는 하자는 것과 말자는 것을 잘 실행했는지 대조해 보아야 합니다.
이 상시응용주의 6조는 대종사님의 평생 일과였으며, 바로 마음공부였습니다. 더불어 노는 시간이 길어지면 경전법규 연습하기를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연습이라고 하는 것은 반복적으로 단련하라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반복해서 연마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계를 당하면 생각이 바로 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연습은 꾸준히 반복적으로 단련해야 합니다. 스스로 알 수 있을 때까지 해야합니다.
경전에 보면 괴로운 일을 당하면 사죄를 올리라고 했습니다. 염불을 하여 마음을 가라앉히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괴로운 일이 왜 생겼습니까? 인과보응의 이치를 놓고 볼 때 과거에 잘못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과의 원리요, 일원의 진리입니다. 사죄를 한다는 것은 일원상을 믿는 것이죠. 그래야 하는데 우리는 괴로운 일을 당하면 염불부터 하려고 합니다. 길거리 다니다가도 괴로운 일을 당하면 사죄를 올리고 즐거운 일을 당하면 감사를 올리자하면서 외우고 다녀야 합니다. 외우지 않으면 알긴 알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합니다.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안되었지만 어느 날 병원에 가서 혈압 때문에 검사를 받았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더군요. 바로 즐거운 일을 당하여 감사를 올리자고 저절로 떠오르더군요. 그러니 마음이 너무 기쁘더군요. 그대로 실행하니까 은혜, 감사의 마음이 나오더군요. 자기 자신의 마음작용을 통해서 인과보응의 이치가 저절로 깨쳐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전대로 해야 합니다.
제가 어릴 적에 증조할머니와 같이 살았습니다. 돋보기를 가지고 아침에 염불하고 저녁에는 책을 읽으시고 했어요. 그 책이 불조정전이였는데 지금도 가지고 있지만 하도 읽어서 닳았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공부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할머니께서 손자를 자비의 눈으로 바라보는 진심이 생기거든요. 여러분들도 교전을 읽고 공부하여 자비의 마음으로 손자를 바라보고 살펴주면 그 손자는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읽고, 또 읽고, 실행에 옮길때까지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을 하자는 것일까요? 교전에 ‘좌선을 오래 오래하고 보면’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우리의 공부는 오래 오래 반복적으로 했을 때 실효과가 나타납니다. 저도 그 경험을 해 보았습니다. 좌선을 오래 하는데 안되면 또 하고 또 하고 했는데 어느 날 잘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공부를 오래 오래 정성으로 해야 합니다. 정성껏 공부를 해야 합니다. 좌선한번 하는데도 정성을 많이 들여야 합니다. 세수도 하고 목욕도 하고 그러면서 좌선을 해야 합니다. 그냥 일어나서 하는 것과 같겠습니까? 그래야만 그 효과가 나옵니다. 그 한번을 하는데도 정성을 들이고 공부하면 반드시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의 효과는 무시로 대조해서 실행에 옮기는 것과 정성으로써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다보면 고비가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죽을힘을 다해 해야 합니다. 대적공 대정진을 해야 합니다. 월드컵 보셨죠? 대~한민국 이라고 하죠. 이러면 큰 민국이 되죠. 이렇게 공부를 대~정진해야 합니다. 보은도 대~보은해야 합니다. 우리가 대~보은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금생에만 하면 안됩니다. 다음 생에도 그 다음 생에도 해야 합니다.

대종사님의 분화신 되어
우리 교단이 10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우리 교단은 40-50년 결실이요, 4-5백년 결복이라고 100년이 넘어서 500년까지 결복의 기간이 있어요. 우리 교법이 사회로, 세계로, 미래로 나가서 그 효과를 보는 것이 결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보은을 하자면 그 결복기에 내가 주인이 되어 일을 해야합니다. 그것이 보은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나이가 많아서 늦겠죠? 다음 생에 나서 하려고 해도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응용형세를 보아 미리 연마하기를 주의하는 것을 해야합니다. 바로 마음공부를 하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 다음 생에 나와서 결복기 교화를 이루겠다는 서원을 세워야 합니다. 법문공부 중에 법위등급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출가 여래위의 서원을 세워야 합니다. 종사위에 올라서 공을 위해서 사를 버리는 대보은을 하는 것입니다.
다음 생에는 대보은을 해야 하는데 스스로 몸바쳐 일해야겠다는 출가의 서원을 세우는 것이 대보은입니다. 생각을 하면 무의식속에 있다가 다음 생에는 출가의 종자가 되어 나오게 됩니다. 여래위는 일체 생령의 따뜻한 어버이가 되고 육도세계를 자유 자재하는 법력을 나투겠다는 것입니다. 출가 여래위를 세우고 대서원 대정진을 열심히 하다보면 필수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가지고 정진을 하면 다음 생에 대종자, 대보은을 할 수 있습니다. 대종사님이 과거시대는 “일 여래 천 보살의 시대였는데 앞으로 천 여래 만 보살의 시대가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여래, 많은 것 같은데 많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9999도 천 여래입니다. 여러분들 자리가 많습니다. 그 대열에 끼어 공부를 합시다. 그래서 이와 같은 공부를 통해서 우리가 다음 생에는 대종사님의 분화신, 몸은 둘인데 마음은 하나가 되어 결복기 교운을 열어가고 천 여래 만 보살의 공덕을 나투어야겠다고 대서원을 세우고 대보은을 했던 예전의 선진님들이 대종사님의 분화신입니다. 우리들도 대종사님의 분화신이 되어서 새로운 시대 일원회상에 대회상을 건설하는 주인이 됩시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산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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