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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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대종사
  • 한울안신문
  • 승인 2002.09.2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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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지구 청년연합법회 " 9월14일 " 종로교당


이환욱 교무


원불교 부처관
반갑습니다.
저는 도봉교당 출신인데 중학교 때는 원남교당에 다녔었고 종로교당에도 자주 왔다 갔다 했습니다.
저는 지금 안암교당에 있으면서 교화활동은 하지 않고 있고, 공부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종로지구 연합법회를 한다는 말을 듣고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처음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종로지구 청년 대종사님을 뵙게 되어서 무척 반갑습니다라구요. 제가 어딜가도 이런 말을 자주 씁니다. 어린이, 학생들한테도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다들 부담스러워합니다. 대종사님은 우리가 도달하기 힘든 분이다라면서 부담스럽고,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그럽니다. 그런데 원불교 부처관이 사실 그렇습니다.
성리품 29장 말씀에 외부에서 총부를 방문해서 ‘귀교의 부처는 어디에 봉안되어 있느냐?’ 물으면 대종사님은 ‘잠깐 기다려라’하시고 산업부원이 들에서 일하고 오는 사람들을 가리켜 ‘저 사람들이 부처다’라고 하셨습니다. 보통 세상에서 성자, 성인 이라고 하는 것은 엘리트관에 입각해서 하죠. 그들 성인이 때에 따라 나와서 우주의 기운을 좌지우지하고 나머지 수십억, 수백억의 사람, 동물, 식물들은 성자들이 이끄는 기운에 따라서 움직이는 종속적인 관계로 표현을 할 때가 많습니다. 교무님들이 말씀을 하실 때 그런 말씀을 하실 때가 많죠. 그것은 상당히 그런 측면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원불교의 부처관은 결코 그런 측면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분들 중에 총재이신데 아주 잘 사시고, 좋은 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신 두 분이 어떤 계기로 만나셨는지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도를 닦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산속에서 기도를 해서 세상기운을 조절하기 때문에 세상에 우환이 없고 말세에도 유지가 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물론 그분들의 기운이 조금은 도움이 되겠죠. 기도의 위력이라는 것은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설마 이 넓은 우주에 그런 여러 가지 일들이 그분들 소수 몇 분에 의해서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있을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는 교법에 밝히시기를 일원의 진리를 일원즉 사은이요, 사은즉 삼라만상이라고 하셨죠. 부처님 마음, 일원의 진리, 이것과 삼라만상 모든 중생이 둘이 아니라고 하신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께 청년 대종사님이라고 호칭을 붙일 수 있는 것이고, 실제로 여러분들 개개인들에게는 우주를 관장할 수 있는 능력들이 스스로 구비되어 있다고 자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잘 안돼죠. 방금 전 법문 마지막 마무리도 이분들이 부처라고 하시고 “사람들이 더욱 그 뜻을 알지 못하니라”로 끝이 났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모르시면 저와 함께 두고두고 화두로 삼고 연마를 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이몬 소리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잘 알려진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서양철학자 소크라테스라는 분이 계셨죠. 이분이 어릴 때 강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몇 명의 아이들이 강아지 한 마리를 자꾸 강물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럼 강아지는 헤엄쳐서 다시 나오죠. 그러면 다시 그 강아지를 던지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강아지가 기운이 다 되어 못나올 익사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때 소크라테스의 귀에 그런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이봐 뭐하나? 저 강아지를 구해야지” 그래서 뒤를 돌아봤는데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둥절하게 있는데 또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빨리 강아지를 구하라니까!”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가 끌어당기듯이 강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강아지를 구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뛰어들고 나서 소크라테스도 수영을 못했나 봐요. 자기도 익사지경에 처하고 정신을 잃고 일어나보니 마침 지나가는 어른이 구해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오는 길에 ‘누가 나에게 저 강아지를 구하라고 말을 했지?’하면서 고민을 계속하다가 깨침을 얻었죠.
그 소리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바로 내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는 겁니다. 그쪽나라 말로 신령스럽다라는 뜻을 다이몬이라고 합니다. 다이몬의 소리라는 것은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 진리의 소리라고 소크라테스가 이름을 붙였습니다.
자! 2500년을 뛰어넘어 봅시다. 저는 똑같은 얘기를 TV에서 봤습니다. 최일도 목사님이라고 청량리에서 노숙자, 부랑자들에게 밥을 주고 인간의 사랑의 반향을 불러일으킨 분입니다.
그분이 목사니까 신학대학교 다녔을 때였는데 신학도 신학이지만 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틈만나면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춘천으로 자주 다녔습니다. 그날도 시를 쓰고 싶어서 문득 청량리를 찾았습니다. 역광장을 지나가는데 왠 노인이 남루한 옷을 입고 땅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누가 도와줘야하는데, 불쌍하다, 생각하셨답니다. 그리고는 춘천행기차를 타고 시를 쓰고 다시 청량리로 왔을 때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셨습니다. 아까 그 노인이 그때까지 그 자리에 계신 것이였습니다. 한여름에 더운 볕을 그대로 받고 그때까지 계신 것이였습니다. 그때 최일도 목사님 마음에 굉장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셨답니다.
경찰들을 욕하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을 욕하게 되고 행정당국을 욕하게 되고 그러면서 버스를 타려고 지나치셨답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아니야!”라고 외치더라는 겁니다. 그 소리가 두 번이나 들려서 그 노인에게 가서 어디가 편찮으시냐고 물었더니 그 노인은 배가 고파 힘이 없어서 누워있다고 하더랍니다. 또 한번 충격을 받으시고, 그 노인에게 밥을 사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유학을 포기하고 라면 한 박스를 가지고 와서 끓여드리기 시작하니 사람들이 모여들어 라면이 밥으로 변하고, 또 그 지역 폭력배에게 시달렸지만 결국은 이겨내고 300명이 넘는 ‘밥퍼공동체’ 곧 식탁공동체를 이루어내셨죠. 지금은 다일선교회라는 것을 세우고 굉장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제가 이렇게 2500년 사이에 뛰엄뛰엄 있었던 제가 알고 있는 이 두 예화를 말씀드린 것은 바로 이 ‘아니야’라는 우리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귀울였으면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 대종사님께서 어린 시절에 어떤 진리에 대한 의문을 품으시고 삼밭재 마당바위에서 치성을 드리고 스승님을 찾아 헤매시고, 그 모든 것을 만아지경에 이르시고 폐인이 되실 지경에 까지 이르신 까닭이 바로 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그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원불교의 역동성
대종사님께서 일원의 진리는 우주만유의 본원(本原)이고, 제불제성의 심인(心印)이고, 일체중생의 성품(性品)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자리를 믿는 것이 원불교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그 마음이 원만(圓滿)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하다는 완벽한 성품자리를 깨닫는 것이죠. 그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키우고, 일상생활을 할 때 활용을 하는 것이 일원상의 수행입니다. 일원상 신앙, 일원상 수행은 간단히 얘기하면 이것이 끝입니다.
이것을 금방 제가 말씀드렸던 다이몬소리에 비유해서 좀 바꿔서 얘기하면 우리가 이 성품에서 들려오는 다이몬의 소리를 잘 들을 줄 알아야 하고 그 소리가 잘 들리게 볼륨을 키워야 하는 것 이 양성공부이고 그 소리가 전하는 바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은 솔성이 되겠습니다.
우리 청년 대종사님들께서 이 시대에 가장 들어야하는 소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전 이 시대성을 간파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서 더욱 하게 됩니다.
대종사께서 이 회상을 건립하시고 그 어려운 시절에 방언공사하시고, 저축조합사업하시고, 문맹퇴치운동하시고, 이것이 다 민족자립을 위한 신앙공동체를 꾸리는 모습이셨습니다. 그 시대에 가장 필요로 하는 활동을 하신 것입니다. 그 시대에 우리 원불교의 역동성은 세상을 이끌어갈 만한 선진적인 활동이였습니다. 일제시대에 가장 탁월한 도산 안창호 선생님도
감탄을 하시고 갈 정도로 역동성을 보였습니다.
저는 이 역동성이라는 말을 요즘 자주 쓰는데 월드컵 때 다이나믹코리아라는 것이 다이나믹이 해석이 잘 안되더라구요. 어느 광고에서 그 표현을 적절하게 하던데 그래서 다이나믹코리아, 다이나믹원불교의 그 모습이였어요.
그리고 일제가 물러나고 우리가 시대의 어떤 소리를 들었는가 전제동포구호사업을 했어요. 일제치하에서 괴롭힘을 당한 사람들이 다 도망갔다가 다시 밀려왔지요. 대책이 없잖아요. 우리 원불교 어른들께서는 그분들을 품어주는 역할을 하시고 가장 필요한 교육사업에 몰두를 하셨습니다. 그것이 가장 살아있는 시대정신이였죠. 그 힘들이 바탕이 되서 60-70년대 한국은 경제가 소위 개발독재시절로 들어서면서 엄청난 경제적인 역동성을 보였고, 원불교는 그때에 교세를 세계에 뻗어야 되겠다하여 세계교화에 나섰습니다. 그 시간에 양적이나 질적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것이 원불교가 불교를 개혁하면서 시대화, 대중화, 생활화의 정신이 그대로 반영이 되었기 때문에 원불교가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80년대부터 병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역동성이 상실하게 됩니다. 당시 시대성은 수많은 학생들, 노동자들이 독재 권력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죠. 요즘 의문사규명한다고 나오고 하는데 심지어 저는 80년대 끝부분에 학교를 다니는데 그때도 죽임을 당하고 그랬습니다. 80년도 전체가 그런 시절이였습니다.
원불교가 힘도 없고 그랬지만 현실적인 문제에 침묵을 했지요. 거꾸로 얘기하면 우리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다이몬의 소리를 외면한 것이죠. 우리가 그 소리를 못들을 리가 없는 것이거든요. 그러한 결과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오늘날의 교화침체에 있어 대응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내면화의 소리를 자꾸 외면하다보니 습관화가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역동성에 영향을 주었고, 지금 원불교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한 원인이 되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이제는 우리 청년대종사님 여러분들께서 우리 원불교를 시대중심에 바로 세워 놓을 수 있는 그런 활동들을 하셔야합니다. 교당에 나오고 교무님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대접을 받으려고만 하면 안됩니다. 대접받아서는 원불교가 시대중심에 설수 없겠죠. 여러분들이 귀를 크게 열어서 성품에서 나오는 다이몬의 소리를 듣고 큰 소리로 세상에 전달을 해줘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병맥
그래서 우리가 이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하나에 대해 고민을 했습니다. 근본으로 들어가자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우리시대 후천시대, 초기의 병맥을 어떻게 진단하셨는가에 대해 여기저기 알아봤습니다. 교의품 34장에서 우리시대의 병맥을 돈의 병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가 원망병입니다. 제가 요즘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이 간단한 말씀이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이 돈의 병이라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자본주의병입니다.
지금 역사가 종말했다고 합니다. 형식적으로라도 자본주의에 반대하던 세력들이 망했습니다. 사회운영을 엉망진창으로 해서 망했죠. 이제는 역사가 끝났다는 것이죠, 자본주의 외엔 대안이 없다는 것이죠. 그런 상황이 도래했죠. 대종사님께서는 미리 파악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후천개벽시대를 여는데 첫 번째로 자본주의 병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는 논리가 자본주의 병이거든요. 그중에서도 가장 야만적인 상품화가 사람입니다. 지금의 우리들은 인격체로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노동력으로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상품화하는 그런 야만적인 시도까지 보편화된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시장논리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시장논리, 화폐논리가 적용이 되는 시장영역이 사회에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곳도 많이 있습니다. 소위 자본주의 본질의 구현이라는 신자유주의는 그 영역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식, 도덕, 윤리 모든 부분까지도 상품화의 논리 속에 매몰을 시키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가 시대상황 병맥을 진단을 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인간내면의 영성을 파괴하는 돈의 병에 대해서 대처를 할 것인가? 그런데 크게 대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속에서 사는데 그러나 우리가 생활 속에서 균열을 내보자. 조금씩 균열을 내기위해서 큰 망치로 한방에 낼 수도 있지만 사회구조가 워낙 크기 때문에 전면적인 맞선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은 부분, 생활 속에서 균열을 낼 수 있습니다. 그 균열이 자꾸 커지면 전체가 부스러지는 것이죠.
그것은 돈으로 교환되는 노동이 아니라 대가를 바라지 않는 노동, 부모님이 여러분들을 키울 때 대가를 바라지 않죠. 애인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죠. 그러면 사회적으로 아주 현실적인 얘기로 자원봉사를 비롯한 비영리 단체(NGO)의 활동을 머리에 떠올렸습니다. 얼마 전 수해로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재해의 현장에 누가 있습니까? 돈으로 사서 뿌려놓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봉사단체, 종교단체가 있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수재민들이 힘을 얻고 재활을 할 수 있죠. 그리고 봉사자들도 대가를 받지 않아도 흐뭇해하고 어떤 기자가 언제까지 하려고 하냐 하니까 복구 끝날 때까지 한다고 하더라구요. 복구가 두 달, 세 달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죠. 이것이 사람 사는 맛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체험하는 청년 대종사
원음방송을 들었는데 익산에 가면 솔성성이라는 자원봉사단체가 있는데 거기서 이번 여름에 고등학생들을 데리고 소록도 자원봉사체험을 했습니다. 방송에서 소감을 말하라고 했는데 얘기를 하다말고 우는 것입니다. 이들이 왜 눈물을 흘리는지. 체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입니다. 정말 자본의 논리에 구애받지 않고 인간중심의 사회를 겪어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죠. 그래서 우리 청년대종사님들께서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체험의 시간에 투자를 했으면 합니다. 우리가 모여서 교리를 심도 있게 공부하고, 철학적으로 파고들어가고, 어른들을 찾아뵙고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들이죠.
최소한 청년시기에는 시대적 정신을 반영했으면 하고 몸도 마음도 건강한 이 시기에 활동을 통해서 우리 교리를 습득하고 실천하는 그런 모습들이 라이프사이클을 놓고 볼 때 적절한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저는 많이 해 봅니다.
일원상 서원문에서 은생어해(恩生於害), 해생어은(害生於恩) 구절이 나오죠. 이 뜻을 확실히 아세요? 제가 학교를 다닐 때 좌산종법사님을 모실 때 질문을 했었죠. 종법사님께서 답을 해주셨는데 여름에 농부가 땡볕에서 농사를 짓는데 이것이 해인가 은인가 하는 것이죠. 자기를 괴롭히는 자기의 에너지가 다운되듯이 언뜻보기에 해죠. 그러나 가을이 되면 자기가 흘린 보람보다 몇 배의 보람을 더 얻게 되니 풍부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해에서 은이 나오는 것이다라는 것이죠. 그러면 은에서 해가 왜 나오냐는 것은 복을 받아서 환경 좋고 여건 좋은데, 그럼에도 오만한 것은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죄가 된다는 이치라고 그러시더군요.
거기에 맞춰서 해석을 해보면 대가없는 노동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회를 향해 이웃을 향해 베푼 사랑과 은혜라는 것들은 결국 보이지 않는 무형의 진리에 차곡차곡 저축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당당하게 대종사님이나 우리 원불교인들은 본심을 얘기하고 공도자숭배를 얘기하고 무아봉공을 하라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희생만 하라고는 말하지 못하는 것이거든요. 정말 부모자식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전파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청년이 살아야 조직이 삽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튼튼하기 때문에 이런 청년들이 살아나면 교법 또한 살아납니다. 청소년들 말하는데 우리 청년들이 잘 한다면 그 청소년들은 당연히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경전에 글씨로 된 것을 실천해 나아갈 때 그 교법은 살아있는 교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시대의 가장 큰 병맥인 돈의 병을 치유하는 길, 노동으로 환산해 주지 않는 그런 노동들을 우리가 한번 해 봅시다. 대가를 받지 않고 해 보자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개인적이야, 동양 사람들은 이기적이야, 정이 있어 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전체 경제 규모의 6%가 대가없는 노동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6%가 작은 것 같지만 우리국가 예산보다 많습니다. 이 정도로 많은 재원과 인력들이 자원봉사에 나서는 나라가 바로 미국입니다. 미국이 달리 선진국이 아니라 그런 시민의식이 있기 때문에, 공익에 대한, 공도자에 대한 생각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선진국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일들을 이 시대에 우리 청년들이 앞장서서 했을 때, 다시 우리 교법과 원불교는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설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부끄럽지 않습니까? 선진님들은 어렵게 해 내셨는데 우리 청년들은 어렵다고 말을 하는데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당부의 말씀을 드리면서 저와 여러분과 함께 다이몬의 소리를 자꾸 듣고, 확성시켜서 실천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산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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