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여는 마음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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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여는 마음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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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8.0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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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권도갑 교무"도봉교당
나의 조물주는 나다
자신이 태어나서 가장 기쁘고 행복했을 때를 종이 위에 적어봅시다. 결혼했을 때, 아이를 낳았을 때 시험에 합격했을 때 좋은 선물을 받았을 때 등등 많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반대로 자신이 태어나서 가장 괴롭고 힘들었을 때도 기록해봅시다. 배신당했을 때 병이 들었을 때 사고를 당했을 때 등입니다.
이제 먼저 가장 기분이 좋았을 때를 생각봅시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다고 합시다. 선물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선물을 받았다고 해서 항상 기쁘지는 않겠지요? 가끔은 씁쓸하고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선물을 받으면 왜 나에게 이런 선물을 했을까? 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하겠지요. 여기서 잘 보세요. 선물이라는 것은 하나의 상황 즉 경계인데 선물로 인해 내 마음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상황 그 자체와 상대방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단지 바로 내 마음속의 집착 때문입니다. 문제는 상대와 상황이 아닌 바로 내 자신에게 있습니다. 선물을 받고 싶다는 집착에 빠져 있을 때 만일 선물을 받지 못한다면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가장 기뻤을 때와 괴로웠을 때의 상황에서 나에게 유익하고 해로웠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적어봅시다. 가장 기뻤을 때 나에게 해로웠던 것은 무엇이며, 가장 괴로웠을 때 나에게 유익했던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을 때 어려서부터 자력을 얻을 수 있었다면 괴로웠을 때 그것이 나에게 유익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는 욕심이 많아지거나 돈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여러 가지 장점과 단점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출산을 앞둔 산모에게는 아이의 탄생이 너무나 기쁜 일이지만 고통도 따르게 됩니다. 즉 고와 락은 함께 합니다. 여러분들이 적어놓은 것을 보면 어떻습니까? 가장 기뻤을 때 나에게 해로웠던 것이 있고 가장 슬펐을 때 나에게 유익한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고와 락은 항상 동시에 존재합니다. 손해가 이익이며 이익이 손해가 됩니다. 은생어해(恩生於害)이며 해생어은(害生於恩)입니다. 여기에는 절대적인 이익과 손해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누구에게서 받거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즉 자신이 주인이며 자기에게 권리가 있습니다. 한 예로 손해를 보았을 때 그것을 손해라고 보면 괴롭고 이익이라고 생각하면 기쁩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즉 나의 관점에 따라 마음먹기에 따라 슬프기도 괴롭기도 합니다.
이처럼 고락은 바로 자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락의 책임도 상대나 상황이 아닌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사실입니다. 나에게 이런 권리가 있기 때문에 힘이 납니다. 만약 이런 권리가 상대방이나 상황에 있다면 힘이 빠지고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디가나 괴롭고 원망생활을 하게 됩니다. 정산종사께서 ‘감사생활만 하는 이는 늘 사은의 도움을 받게 되고 원망생활만 하는 이는 늘 미물에게서도 해독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 생활 속에서 우리는 신앙을 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의 책임은 나에게 있고 어떤 것도 나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이 사랑스럽고 미워하면 그가 미워집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이 나의 마음이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달게 받으면 기쁘게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힘이 생기고 주인이 됩니다. 대종사님께서 “나의 조물주는 바로 나 자신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게송의 실천과 마음공부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至極) 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 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 이다.

대종사님께서 원기26년(1941) 열반을 앞둔 3년 전에 밝혀주신 게송입니다. 게송은 역대 성자들이 임종을 앞두고 한 제자에게만 일러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종사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 게송을 전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세계종교사에 흐름을 바꾸어놓는 일입니다. 단 한사람이 아닌 모두에게 마지막으로 꼭 해주고 싶은 말을 전해준 것입니다.
따라서 주세불이신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이 게송을 받고 안 받고는 우리들 마음에 달려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게송을 어떻게 우리들 삶 속에서 활용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봅시다. 처음에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라고 했습니다. 여기 유와 무는 음과 양, 고와 락, 선과 악, 죄와 복, 위와 아래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눈을 감고 지금 자신의 주위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을 머리 속에 떠올려 봅시다. 그 사람이 나에게 미운 존재이고 괴로운 존재라면 그 사람을 한없이 사랑하고 축복을 해봅시다. 그 사람의 앞날을 축원해주고 사랑해봅시다. 반대로 그 사람이 나에게 고맙고 행복한 존재라면 그에게 한없이 미워하고 화를 내봅시다. 마음속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내고 온갖 미움마음을 가져봅시다. 마음이 어떻습니까?
이제는 다시 반대로 생각을 해봅시다. 이렇게 계속 마음속에서 그 사람을 미워하고 좋아하고 또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반복해봅시다. 마치 목욕탕에서 온탕과 냉탕을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반복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이제 눈을 뜨고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살펴봅시다.
보통 우리들은 자신만의 기준이 있습니다. 위치가 높고 낮음이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르게 말을 합니다. 즉 사람들마다 자신만의 기준이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기준에 못 미치면 싸우게 됩니다. 마음속에 분별성과 주착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따라 선하기도 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할 때와 동할 때가 있으며 능히 선하기도 하고 능히 악하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악한 사람도 없고 미운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유는 무로 무는 유로 처럼 선과 악, 고와 락을 그대로 적용해야 됩니다.

분별성과 주착심의 경계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만의 기준을 둠으로써 분별과 주착을 가지고 한가지를 고집하며 판단하고 괴로워합니다. 여기에 사고(思考)의 유연성이 요청됩니다. 민주주의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공산주의는 무조건 나쁘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자신의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은 밉고 자신을 괴롭힌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도는 것을 아는 사람은 손해 속에 이득을 발견하고 이득 속에서 손해를 발견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따라서 상대방이나 상황이 자신을 괴롭힐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만약 내가 허리가 아프다고 합시다. 허리가 아픈 것은 어쩌면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프다는 것은 곧 자신이 살아있음을 발견하는 좋은 것입니다. 통증이 없는 것은 곧 죽은 것입니다. 나의 몸이 아프고 괴로우면 그 속에서 고마움을 발견해야 괴로움이 진정한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마음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미운 마음이 들면 미워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기분 나쁜 마음이 들면 참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병이 됩니다. 고가 락이 되고 락이 고가 되며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이 소식을 알고 적용해 보면 그 어느 누구도 상극이 아닌 상생의 인연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이나 구공 역시 구족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의 삶 속에서 이것을 활용해야합니다. 이 소식은 곧 모든 것이 마음에 있고 한 곳에 머물지 않으며 이것이 옳고 그르다고 말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적으로 삼고 영원히 없어져야 할 것은 없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면 그 사람에게 그 기운이 전해져서 더욱 힘이 강해져서 나에게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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