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빛치는 일원의 서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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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빛치는 일원의 서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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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8.1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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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타원 한은숙 교무 " 화정교당
구소련에 교화 첫발
제가 1992년 3월에서 2001년 9월까지 모스크바에서 9년 6개월 정도를 근무했습니다. 저의 일생에 있어서 모스크바는 정말 중요하고 최선을 다해서 일한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1992년에 근무를 했는데 제가 가기 전 1990년에 초타원 백상원 교무님이 모스크바를 다니면서 재단 운동도 하시고 살펴보시기도 했습니다. 백교무님은 1990년 12월에 한국상임재단과 한인지역인 타쉬켄트 그리고 알마타르 지역을 방문하셨습니다. 그 때 뉴욕에서 모스크바를 가실 때 백교무님은 교전하나 들고 그리고 겨울철이어서 제가 따뜻한 옷을 챙겨드렸습니다. 그렇게 10일 동안 갔다가 오셨는데 무려 10kg이나 빠져서 오셨습니다. 공항에 마중을 나갔는데 몸이 더욱 마르셨습니다. 돌아오신 교무님께 “러시아는 어떠셨습니까?”라고 여쭸더니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고 하셨습니다. 들어가서 가방을 열어보니까 제가 준비해준 옷은 모두 현지인들에게 주시고 돈도 모두 주시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백교무님께 하시는 말씀이 “모스크바, 타쉬켄트와 알마타르에 가서 고려인들을 만나보고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그 사람들 마음에 들어있는 한을 보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백교무님과 같이 동행한 몇몇 분들은 뉴욕에서 비행기를 타고 고려인들이 얼마나 어렵게 사는지 보기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가서 한민족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고 말하면서 남자분들이 많이 우셨다고 합니다. 조국이 있어도 만날 수가 없고 가지도 못하는 아픔 속에 살아온 정착 생활이 한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이민과는 아주 색깔이 달랐습니다. 미국 이민들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서 갔습니다. 그래서 좋든 나쁘든 자신들이 선택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한국보다는 미국의 생활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생활이 한국 생활보다 낫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왠지 우리들에게 눌려있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들에게서 한이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런걸 보면서 백교무님께서 우리가 교화를 하려면 바로 지금이며 아무리 힘들어도 러시아의 교화를 시작해야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려인들을 만나고 가장 가슴속에 깊이 느낀 것은 고려인들이 한국말과 문화 그리고 한국의 법에 대해 배우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들을 총부에 건의하고 검토를 해서 러시아 교화를 해야겠다는 결의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중앙총부에서 약간의 지원과 함께 재단을 형성하라고 해서 1991년 재단승인을 받았습니다. 러시아는 공산주의 시대였지만 종교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재단 건립을 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와 고려인
1991년 8월 달에 미국에서는 저와 백교무님 그리고 한국에서 15분의 교무님과 청년들이 함께 러시아 교화를 위해 모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8월19일에 러시아를 방문하기로 했는데 그 때 러시아의 고르바쵸프 대통령이 휴양을 간 사이에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방문 하루를 남겨두고 일어난 일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야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결정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일 천하로 쿠데타가 끝나고 고르바쵸프가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우리는 가야될지 말아야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공의 교육을 매우 많이 듣고 배우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가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두렵고 겁이 나서 마음을 못 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에서는 이런 역사적인 상황에 우리가 가서 봐야된다고 연락이 와서 어려운 상황이지만 러시아에 갔습니다.

러시아는 1967년에 우주선을 쏘아 올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나라였지만 1992년 모스크바는 완전히 전쟁폐허 뒤의 모습이었습니다. 건물이 무너지고 창문이 부서진 곳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공항은 어둡고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무뚝뚝함을 보면서 정말 국제 도시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습니다. 전화 통화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러시아에 들어갔을 때 교도님 댁에서 묵으니까 괜찮았지만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은 어디서 자고 무엇을 타고 다니는지 서류를 제출하지 않으면 입국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행사업을 하는 분과 연락이 되어 비행기 한 대를 100불에 대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환율 차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80인승의 비행기를 타고 타쉬켄트지역에 도착해서 고려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갔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하자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저희들을 붙잡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을 위해서 식사까지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너무 감격해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할아버지들은 교포1세로써 한국말은 잊어버리셨지만 뿌리를 놓지 않고 지키고 계셨습니다. 그분들은 저희들의 손을 잡고 정말 우리가 한국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지금 정말 한국 사람과 만나고 있는 것이 맞냐고 물으면서 조국의 흙을 한번이라도 만져보고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들이 꼭 한국 땅을 밟게 해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지금도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송구스럽습니다.

한국학교로 교화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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