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눈보다 마음의 눈을 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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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눈보다 마음의 눈을 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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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1.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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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일 교수 " 중곡교당
눈은 마음의 창
눈은 신체의 한 부분이면서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몸이 천냥이면 눈은 구백냥"이라는 속담은 눈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처럼 마음의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 보여주며, 말을 안해도 눈으로 뜻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화룡점정은 용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린다는 뜻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을 끝내므로 일을 완성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불상이나 불화, 만다라, 석탑, 불단 등을 새로 조성하거나 개수하였을 때 반드시 공양하고 불구의 근본서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마지막 절차로 점안의식을 행합니다. 점안의식은 불교신앙의 대상에다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의식으로, 즉 눈이 열려야 생명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불상이나 탑이 처음엔 종이, 돌, 나무의 천연물에 불과했으나 그 자연물에 조각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면 예술품이 됩니다. 그런데 그 예술품을 신앙의 대상으로 인정하여 살아 계실 때의 불보살의 위신과 영감을 불어넣게 되면 부처님의 신통력과 영험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불구의 점안의식을 봉행해야만 신앙의 대상이 됩니다. 육근 중 하나인 안근이 분별심을 여의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때 "정견(正見)"이 열린다고 합니다. 해탈에 이르는 팔정도의 실천은 정견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1-23절에서 “네 보물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눈은 "마음의 눈"입니다. 이 눈이 탐욕스러우면, 우리의 몸도 탐욕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마음의 눈이 어둡고 병들어 있으면 육신의 몸도 병들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밝으면 우리의 육신도, 영도 밝음을 체험합니다.
보조스님께서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에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선사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아무리 복이 많고 지혜가 있고 들어서 아는 것이 많아도 도저히 구제될 수 없다.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생각하는 갖가지 경계만을 반영할 뿐, 본 마음을 돌이켜 볼 줄도 모르고, 또 부처님의 도를 보지 못한다. 일생동안 지어서 쌓여 온 악업(惡業)의 과보가 모두 현실로 앞에 나타나면 두렵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며, 육도(六道)와 오온(五蘊)이 앞에 나타나도 이것들이 모두 장엄한 집이나 배나 수레나 빛나는 광명으로 보인다. 이렇게 제 마음을 방종하여 탐애(貪愛)하는 소견으로 모두가 좋아하는 경계로 보고 이에 따라 업(業)이 무거운 곳에 태어나므로 전혀 자유가 없다. 그러므로 용이나 축생도 되고 귀하게도 천하게도 태어남을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한다.”

눈의 종류
그러면 눈에는 몇 가지가 있는가? 우리는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의 오안이 있다고 합니다. 육안은 중생(衆生)의 눈으로, 사물의 표면만을 보는 눈으로 앞에 것은 잘 보이나 먼 것은 잘 보이지 않으며 감춰진 것도 볼 수 없습니다. 몸밖은 볼 수 있지만 몸 안은 볼 수 없습니다. 방안은 보아도 담 밖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과거지사는 볼 수가 없고 미래지사도 또 한 볼 수가 없습니다. 너무 큰 것도 볼 수 없고 너무 작은 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이에 반해서 색계의 눈이기는 하나 천안은 천인(天人)의 눈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봅니다. 그러나 천안의 밝음정도에 따라서 저마다 볼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과거나 현재의 모습, 그리고 미래의 현상을 목전의 손바닥과 같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멀거나 가까운데 상관없이 똑같이 보는 것이며 들어 난 밖의 모습도 분명하지만, 보이지 않는 속의 모습도 분명하게 보는 것입니다. 미세한 미진은 물론 균까지도 현실과 같이 볼 수가 있는 눈입니다. 천안은 깊이에 따라서, 일부만 볼 수가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예들 들자면 천상의 욕계까지는 볼 수가 있는데, 색계나 무색계는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천안은 분명한 육안이 없으면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이 안 되는 것이어서 분명하고 합리적인 육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병통이 됩니다. 혜안은 지혜(智慧), 철학적인 눈으로 慧자는 빛자루 彗에 마음 心 "나"가 없으며, 모양이 없으며, 멸하지 않는, 그 바탕을 요연히 아는 눈. 공과 무아를 바탕으로 해서 무상한 일체 사물의 근본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안과 분명한 천안을 더불어 같이 구비하지 않으면 공이나 무상하다는데 떨어질 우려가 있으며, 일체중생들의 마음과 근기를 모르기 때문에 중생제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말끝마다 없음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아는 것이 없이 무에 떨어지는 것은 육안과 천안을 제대로 구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합리적인 육안과 천안을 두루 갖추지 않으면 혜안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법안은 보살(菩薩)의 눈, 마음을 밝혀 영심을 찾아야 볼 수 있는 눈으로 法은 물水변에 갈去로 육안 천안 혜안이 두루 밝고 그 바탕의 근본섭리와 연결고리를 알며 모든 선과 악, 있고 없는 양극을 초월해서 걸림으로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갖추는 것이 법안입니다. 온갖 미세함을 다 소멸하고 조금도 치우지지 않으며 두루 넉넉하고 평등해야 하므로 불안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불안은 부처님이 눈 보살들의 눈 불안은 네 가지 눈을 바탕으로 모든 진구를 여의어 주객이 완전히 소멸하고 더 얻을 바가 없으며 원만하고 두루 갖추지 않음이 없으니, 충만하여 부족함이 없습니다. 생사번뇌의 양극을 떠나서 막힘이 없고 영원한 청정한 근본의 눈입니다. 부처님의 눈입니다. 여기에 하나의 눈을 더한다면 일원상을 통해서 보는 일원의 눈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는 정전에서 이 원상(圓相)의 진리를 각(覺)하면 시방 삼계가 다 오가(吾家)의 소유인 줄을 알며, 또는 우주 만물이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줄을 알며, 또는 제불 조사와 범부중생의 성품인 줄을 알며, 또는 생로병사의 이치가 춘하추동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陰陽相勝)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 또는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인 줄을 알리로다. 이 원상은 눈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육신의 눈과 마음의 눈
육신의 눈과 마음의 눈은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몸과 마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하면 됩니다. 신수라고 하는 한 중이 몸과 마음에 대하여 한 편의 시를 벽에 써놓았다. “몸은 보리나무요, 마음은 그 앞에 서있는 밝은 거울과 같다. 항상 거울을 깨끗이 닦아서 먼지가 그 위에 붙지 않게 하라.” 부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곧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마음을 깨끗이 하는 수련을 계속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본 혜능이 또 한편의 시를 그 옆에 썼습니다. “ 예전부터 보리나무도 없었고 밝은 거울도 서 있지 않았노라. 본래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니 어디에 먼지가 붙으리요?”
신수는 정결한 마음을 갖기 위해 도를 닦는 것이 부처가 되는 깨달음의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혜능은 "무심(無心)"이 부처의 길이라고 대답합니다. 육신과 마음이 둘이 아님을 깨치는 것이 바로 부처의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일원의 눈으로 보면 육신의 눈과 마음의 눈이 둘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정리: 김인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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