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원로교무의 대종사 추모담 "그 때 그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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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원로교무의 대종사 추모담 "그 때 그 말씀"
  • 서원정
  • 승인 2004.06.0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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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님은 생불이셨다.
내 비록 80세의 나이지만, 대종사님께 직접 훈증받은 몇 안 남은 친견제자로서 ‘성불"이란 동일 목적을 가진 법동지들에게 대종사님의 성자적 면모를 전해드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무리를 해서 추모담을 하게 되었다.

원불교와의 첫 만남
나는 할머니가 인연이 되어 원불교를 만나게 되었다.
내가 살던 집이 바로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이 처음 만났던 정읍 화해리 교당(제우지)의 터이다.
경북 성주에서 출생한 정산종사님은 어려서 사서삼경을 통달한 수재였다. 어려서부터 큰 인물이 되고 싶었던 정산종사는 자신을 큰 인물로 만들어 줄 스승을 만날 것을 염원했다. 성주 가야산 해인사의 여처사를 만나니, 여처사가 “큰 스승을 만나려면 전라도로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정산종사는 큰 스승이 찾아 주실 거란 막연한 믿음을 안고, 김제 모악산 대원사에서 묵고 있었다.
당시 우리 할머니가 증산교를 믿었는데 증산교인들 간에 “성주에서 큰 異人이 왔다"는 소문이 돌자 대원사로 이인을 뵈러 갔다. 17,18세 무렵이었던 정산종사를 첨 뵙고 달님처럼 환한 모습에 반한 할머니는 무작정 자신의 집으로 뫼시고 싶다고 청을 했다.
그 때가 바로 대종사 대각후 2년째인 원기 2년, 대종사님은 수위단을 구성하고 중앙 자리를 비워 놓으셨다. 주위에서 임명을 권해도 올 사람이 있다며 빙그레 웃으시기만 했다고 한다.
대종사님은 팔산 김광선 선진을 정읍에 사는 김아무개네 집으로 보내, 경상도에서 온 송규를 만나 일체중생을 구원하고 지상낙원을 건설하자는 약속을 하고 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다. 이후 다시 대종사님이 친히 정읍 우리집을 찾아 정산종사를 만났고, 정산종사는 대종사를 뵙고 “자신에게 어렴풋이 떠오르던 스승의 像이 바로 대종사님"이었다며 두말 없이 ‘중앙"자리를 맡았다고 한다. 바로 진리계에서는 ‘영성적인 혜광"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다.
나는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이 만나던 당시엔 세상에 나질 않았고 이로부터 7년 후 태어났다.

할머니의 말씀
내가 14세가 되던 해, 총부에서 셋째 정룡이를 보내라는 연락이 왔다. 할머니는 출가를 앞둔 나를 불러 놓고 대종사님에 대한 3가지 말씀을 하셨다.
-대종사님은 聖顔에서 광채가 난다. 어두운 밤에도 대종사님 곁에 있으면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빛이 난다.
-대종사님은 生佛이시다.
-대종사님은 타심통을 하셔서 사람 마음 속을 꿰뚫어 본다.

대종사님과의 첫 대면
혼자 익산의 총부에 도착해 조실에 계신 대종사님을 처음 뵈었다. 오후 3시라 그런지 남향 창을 등지고 흰 법복을 입고 앉아 계신 대종사님은 정말 번쩍번쩍 빛이 났고, 풍채가 워낙 좋아 방에 가득 차 보였다.
당시 대종사님은 워낙 풍채가 좋아서 인력거 체장이 부러질 정도였는데, 그렇다고 비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키와 풍채가 적당하게 보기 좋았다. 단, 워낙 풍모가 좋아서 기차역에 대종사님이 나타나면, 벌떼처럼 모였던 사람들도 그 위엄에 눌려 절로 길을 내어줄 정도였다.

대종사님은 과연 생불
2600년 전, 부처는 49년간 설법을 했는데, 그중 화엄경이 마지막 설법이고 가장 진수라고 본다.
그런데 화엄경에는 ‘동해바다 속에 금강이란 산이 있다. 옛부터 그곳엔 많은 보살들이 났고, 지금도 1200 법기보살들이 설하고 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금강산은 한국을 말하는 것으로, 중국의 화엄학자인 ‘진관"이 ‘금강"이 바로 ‘금강산"임을 입증한 바 있다.
또 나는 미륵신앙을 연구해 학위를 받았는데, 미륵신앙은 ‘말법시대에 미륵불이 출현해서 도덕사상을 부활시켜 용화세계, 낙원세계로 만든다"라는 내용을 토대로 한다.
1509년, 울진에서 태어난 남사고 선생은 ‘격암유록"이란 예언서에서 ‘말세가 되어 도덕이 땅에 떨어져 혼란이 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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