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덕 교무가 들려주는 초기 서울 교화 약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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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덕 교무가 들려주는 초기 서울 교화 약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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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11.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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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동 605번지 경성출장소
누가 입산하였다고 하면 사람들은 으레 머리 깎고 중이 되는 줄로 안다. 십상도 <봉래제법상>에 보면 대종사 삭발한 모습으로 제자들과 교법을 초안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변산 4년간의 대종사는 정자관에 상투머리 턱수염의 젊은 유학자의 풍모였다. 그러면 하산할 때의 대종사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백학명 스님이 워낙 간곡하게 붙들고 불교중흥 사업을 하자고 종용하는 바람에 내장사에 갔으나 산중 승려들의 반대로 뜻같지 않아, 대종사는 삭발을 하고 새로운 창립 인연을 찾아 경성으로 갔다.(이로써 진묵의 ‘眞僧은 下山하고 假僧은 入山한다’는 예언이 실현되었다) 내장산에서 대종사는 송상면을 제자로 얻고 그에게 萬京이란 법명을 주었다. 서울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가를 십분 짐작할 수 있다.

최도화 안내로 상경
경성 길 안내는 비단장수 최도화가 하였다. 최도화는 임실 금평 여인이다.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고 살다가 가정불화로 동네 앞 방죽에 투신하였다. 지나가던 여승이 살려내어 최씨는 한강변 두뭇개 승방으로 따라갔다. 현재 성동구 옥수동 종남산 미타사이다. 이후 최도화는 비단장수를 하며 명당을 찾아다니며 기도에 주력하였다.
진안 좌포의 김승지댁 며느리가 부종병으로 고생하다가 만덕산에 산제당을 짓고 9년간 공을 들여 병이 나았다. 이 소문을 듣고 비단장수가 그 옆에 산신각을 짓고 공을 들이기 시작하였다.
법인성사 직후 대종사는 송규를 월명암 백학명 주지의 상좌로 보냈다. 불명은 明眼, 학명선사의 가장 촉망받은 제자가 되었다. 대종사가 실상동에 석두암을 짓고 주처가 안정되자 명안은 내려와 월명암에 올라가지 않았다. 학명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대종사께 따졌다. 대종사, 명안에게 “너 가고 싶은 대로 가거라. 그러나 전주는 돌아보지 마라”고 하였다. 그래서 명안은 예전 자기가 잘 다녔던 길로 가다가 전주로 가는 갈림길에서 미륵사 주지를 만났다.
산제당 등 너머가 바로 미륵사이다. 화주라고 자처하는 비단장수가 정월에 미륵사에 왔다가 명안스님을 보고 그 이쁜 모습에 반해 생불님으로 받들었다. 승복 한 벌을 마련해오는 동안에 명안스님은 봉래정사의 기별을 받고 바로 떠났다. 뒤이어 비단장수는 2백리길을 걸어 봉래정사에 왔다.
“방죽을 파놓으니 과연 모여들긴 모여들구나” 왕 생불님을 뵙고 비단장수는 넙죽 오체투지, 법명을 최도화로 받았다.
경성역에 내리자 각 여관에서 일제히 손님 마중을 나왔다. 서른한살 나이에 벌써 머리털이 성근 석두거사는 처음 삭도 머리에도 저녁햇살에 유난히 광채가 났다. 여관주인의 능란한 수완일까. “불덩어리가 둥글둥글 굴러오시는 것 같다”며 거사의 손을 잡고 자기 여관으로 이끌었다.

이공주 입교
다음날 최도화가 태평여관으로 환갑이 다 된 곱게 늙은 할머니와 같이 왔다. 만면에 희색을 띄며 큰절하는 것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어 대종사는 박사시화라는 법명을 주었다. 최씨가 얼마전에 화엄사로 불공하러 가는 노인을 전주역에서 만나 후일 만나기로 약조를 하였다는 그 사람이다. 박사시화는 계동 조카집(성성원)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거기에 또 사시화와 똑같이 생긴 노인(박공명선)이 일행을 반겼다. 서중안이 당주동에서 집을 빌려 일행은 한달간 머무는 동안 왕궁의 여인 이동진화를 만나고, 또 만덕산 산제당에서 공을 들여 병이 나은 좌포 김씨 종부 이현공을 만난다. 이현공은 경기고보에 다니는 아들을 위해 계동에 집을 마련하여 살았다.
원기9년 6월1일 익산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한뒤 소태산 총재는 피곤한 심신을 만덕산 산제당에서 여름 한철을 쉬었다. 이때 경성 회원 박사시화와 이동진화가 와서 함께 수양하였다.
그 해 가을 석두거사는 다시 경성에 와 이동진화가 마련한 창신동 605번지에 머물렀다. 이 무렵에 이공주가 입교하였다. 이듬해 대각사 백용성스님 문하의 독실한 신자였던 이공주의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조카 김영신이 입교하였다.

초대교무 주산
원기11년 여름에 약관 20세의 송도성이 경성출장소 초대교무로 부임하였다. 총재의 영양 박길선이 와서 경성부기학원에 다녔다. 길을 모르는 길선을 송 교무가 전차로 안내하는 것이 김영신의 눈에 그렇게 다정해 보일 수가 없어 두 사람이 결혼할 사인가 보다 짐작하였다. 1년만에 송 교무의 형인 정산이 2대교무로 부임하고, 그 이듬해에 두 형제의 고종사촌 이춘풍이 3대교무로 부임하였다.
이 교무가 2년간 살고 병으로 쉬게 되자 4대 교무로 팔산이 부임하였으나 2개월만에 본관에 귀관하였다. 이후 재가회원인 이공주가 교무 일을 보았다. 원기18년에 여교무로 이동진화, 남교무로 이완철이 부임하였다. 응산 이완철은 경성지부에서 13년간 재임하였다. 돈암동 앵두나무골로 새집을 신축하여 옮긴 것은 원기18년 11월이다. 역대 임원록(원기22년)에 보면 경성 회원 성성원이 교무로 발령받은 것이 보인다. 재가출가 구분없이 교무직을 수행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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