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천당 불신 지옥" 유감
상태바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유감
  • 한울안신문
  • 승인 2006.04.17 1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명재 교수의 생활의 발견
일요일 오후 수락산을 찾았다. 전철을 탔는데, 며칠 사이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달라졌다. 샛노란 개나리와 파릇파릇한 어린잎들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계절이 온 것이다.
달리는 전철 안에서 봄의 정취에 젖어 잠시나마 행복한 순간을 맛보고 있었다. 혼잡 속에서도 혼자만의 달콤한 세계에 빠져있던 그 때,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 때문에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며 전철 안을 누비는 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바로 주범이었다. 전철 안에는 책을 보는 사람도 있고 조는 사람도 있고, 마음속에 커다란 슬픔을 안고 있는 사람도 있을 터인데, 이들이 누릴 수 있는 소박한 자유는 아랑곳 하지 않고 전철 안을 누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일상수행의 요법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라는 말이 머리를 스친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란 말을 들으니 내가 당한 선교의 압박이 떠올랐다. 몇 해 전, 국가기관의 출제 관계로 호텔을 빌려 일주일동안 합숙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출제를 마친 사람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대여섯 명씩 한 방에 모여 잡담을 나누었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들어간 방에는 나만 빼고 모두 기독교 신자들이었다(후에 생각하니 계획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야기가 종교 쪽으로 흐르더니 나를 향한 공격적 선교가 시작되었다. 한참 이야기를 듣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독교를 안 믿으면 신변에 불길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나를 발견하고,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하고 그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온 나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랬더니 마음이 좀 가라앉고, 조금 전의 일이 마치 꿈을 꾼 듯하였다.
이런 기독교의 선교를 떠올리면서 우리의 교화를 생각해 보았다. 기독교와 원불교는 태생적으로 다르고 이런 점이 선교와 교화의 차이로 이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즉 기독교의 경우는 예수의 훌륭한 가르침만으로 교세가 확장된 것이 아니라 기적을 보여줌으로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는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 죽음에서 부활하였고, 병든 자를 낫게 하고 악령을 몰아내는 등, 기적은 선교의 바탕을 이루었다. 하지만 대종사님은 수행품에서 밝히셨듯이 오히려 신통(神通)이나 이적(異蹟)을 경계하셨다. 전망품에서는 자기가 올바로 행하는 것이 곧 남을 교화함이 되고, 정당한 법을 여러 사람이 믿고 사용한 결과에 이익이 있다면 교법도 자연히 확장될 것이라고 하셨다.
요즘 캠퍼스에는 신입생들이 기대에 찬 대학 생활을 꿈꾸며 활보하고 있다. 그런데 가끔 두세 명의 학생들이 신입생을 둘러싸고 기독교 동아리 가입을 권유하는 모습이 눈에 띤다. 피하는 신입생을 집요하게 뒤쫓는 경우도 있다. 이런 모습은 기독교 학생이 다수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캠퍼스뿐만 아니라 군대도 마찬가지다. 군대는 기독교만의 선교 대상이 아니고, 따라서 원불교의 군종 참여 허가는 사필귀정이다. 자기 종교와 믿음에 확신을 갖고 적극적 선교를 하는 것은 좋지만, 공격적 선교는 삼가야 한다. 기독교인에게 ‘불신 지옥’은 빼고 ‘예수 천당’만을 외치는 선교를 기대하는 것은 당분간 무리일 것 같다는 느낌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