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정행-최정풍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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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정행-최정풍교무
  • 한울안신문
  • 승인 2006.07.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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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님이 보고 싶어하는 사람-1


처음으로 교전을 읽던 날, 소태산 대종사라는 분을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교전을 읽다보니 벌써 열반에 드셨더군요. 정말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가 너무 늦게 대종사님을 찾아왔나 하는 후회도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대종사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종사님도 우리를 보고 싶어 하신 것 같습니다. 또 특별히 아끼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께서 보고 싶어 한 그 사람의 모습은 정전 <교의편>을 마무리 하시며 쓰신 <사대강령>에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의 첫째는 ‘정각정행’입니다. 당신이 마음으로 그리워한 제자들의 모습.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 부처님의 깨달음을 바르게 이어받아 그대로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사람. ‘일원의 진리 곧 불조 정전(正傳)의 심인(心印)을 오득(悟得)하여 그 진리를 체받아서 안·의·비·설·신·의 육근을 작용할 때에 불편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원만행’ 을 하는 사람, 활불(活佛)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깨달음이 없는 삶은 공허합니다. 깨달았다고 해도 실천이 없다면 헛된 깨달음입니다. 깨달음과 실천은 서로를 증명합니다. 늦은 밤 충혈 된 눈으로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대종사님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 합니다. 물욕에 눈이 어두운 세상에서, 바르게 깨친 사람을 만나기 힘든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기 힘든 세상에서, 정각정행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보고 싶다고 고백하듯이 정전을 쓰시는 대종사님의 그림자가 창호지 너머에서 일렁이는 듯 합니다. 처음으로 교전을 읽던 날, 소태산 대종사라는 분을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교전을 읽다보니 벌써 열반에 드셨더군요. 정말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가 너무 늦게 대종사님을 찾아왔나 하는 후회도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대종사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종사님도 우리를 보고 싶어 하신 것 같습니다. 또 특별히 아끼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께서 보고 싶어 한 그 사람의 모습은 정전 <교의편>을 마무리 하시며 쓰신 <사대강령>에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의 첫째는 ‘정각정행’입니다. 당신이 마음으로 그리워한 제자들의 모습.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 부처님의 깨달음을 바르게 이어받아 그대로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사람. ‘일원의 진리 곧 불조 정전(正傳)의 심인(心印)을 오득(悟得)하여 그 진리를 체받아서 안·의·비·설·신·의 육근을 작용할 때에 불편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원만행’ 을 하는 사람, 활불(活佛)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깨달음이 없는 삶은 공허합니다. 깨달았다고 해도 실천이 없다면 헛된 깨달음입니다. 깨달음과 실천은 서로를 증명합니다. 늦은 밤 충혈 된 눈으로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대종사님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 합니다. 물욕에 눈이 어두운 세상에서, 바르게 깨친 사람을 만나기 힘든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기 힘든 세상에서, 정각정행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보고 싶다고 고백하듯이 정전을 쓰시는 대종사님의 그림자가 창호지 너머에서 일렁이는 듯 합니다. 처음으로 교전을 읽던 날, 소태산 대종사라는 분을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교전을 읽다보니 벌써 열반에 드셨더군요. 정말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가 너무 늦게 대종사님을 찾아왔나 하는 후회도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대종사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종사님도 우리를 보고 싶어 하신 것 같습니다. 또 특별히 아끼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께서 보고 싶어 한 그 사람의 모습은 정전 <교의편>을 마무리 하시며 쓰신 <사대강령>에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의 첫째는 ‘정각정행’입니다. 당신이 마음으로 그리워한 제자들의 모습.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 부처님의 깨달음을 바르게 이어받아 그대로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사람. ‘일원의 진리 곧 불조 정전(正傳)의 심인(心印)을 오득(悟得)하여 그 진리를 체받아서 안·의·비·설·신·의 육근을 작용할 때에 불편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원만행’ 을 하는 사람, 활불(活佛)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깨달음이 없는 삶은 공허합니다. 깨달았다고 해도 실천이 없다면 헛된 깨달음입니다. 깨달음과 실천은 서로를 증명합니다. 늦은 밤 충혈 된 눈으로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대종사님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 합니다. 물욕에 눈이 어두운 세상에서, 바르게 깨친 사람을 만나기 힘든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기 힘든 세상에서, 정각정행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보고 싶다고 고백하듯이 정전을 쓰시는 대종사님의 그림자가 창호지 너머에서 일렁이는 듯 합니다. 처음으로 교전을 읽던 날, 소태산 대종사라는 분을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교전을 읽다보니 벌써 열반에 드셨더군요. 정말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가 너무 늦게 대종사님을 찾아왔나 하는 후회도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대종사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종사님도 우리를 보고 싶어 하신 것 같습니다. 또 특별히 아끼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께서 보고 싶어 한 그 사람의 모습은 정전 <교의편>을 마무리 하시며 쓰신 <사대강령>에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의 첫째는 ‘정각정행’입니다. 당신이 마음으로 그리워한 제자들의 모습.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 부처님의 깨달음을 바르게 이어받아 그대로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사람. ‘일원의 진리 곧 불조 정전(正傳)의 심인(心印)을 오득(悟得)하여 그 진리를 체받아서 안·의·비·설·신·의 육근을 작용할 때에 불편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원만행’ 을 하는 사람, 활불(活佛)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깨달음이 없는 삶은 공허합니다. 깨달았다고 해도 실천이 없다면 헛된 깨달음입니다. 깨달음과 실천은 서로를 증명합니다. 늦은 밤 충혈 된 눈으로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대종사님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 합니다. 물욕에 눈이 어두운 세상에서, 바르게 깨친 사람을 만나기 힘든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기 힘든 세상에서, 정각정행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보고 싶다고 고백하듯이 정전을 쓰시는 대종사님의 그림자가 창호지 너머에서 일렁이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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