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릿골에 터를 잡고
상태바
구릿골에 터를 잡고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10.18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 대산종사 법문

대산종사 원기70년 원평 정양 시 봄빛이 따스할 즈음 구릿골로 산책을 다녔다. 어느 날 제비산을 올라 금평저수지를 바라다보며, ‘옛 원평교당이 저 아래 있었는데 수몰되기 전 원평에서 정양할 때 구릿골 일대를 아니 가본 곳이 없었다. 그 때는 바늘 하나를 찾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 후 구릿골 깊숙한 계곡으로 들어가시어 여기가 화용도 계곡이라 하였다. ‘삼국지를 보면 적벽전에서 관우가 조조를 잡지 않고 길을 터 주어 조조가 화용도까지 달아났다는 장면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화용도라는 느낌이 들었고, 이곳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한 때는 원심원 뒤로 병풍처럼 둘러싼 산이 있는데, 그 산을 가리켜 구성산이라 하였다. 구성산 아래 증산천사가 천지공사를 행한 유명한 약방이 있고, 조금 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원심원이 있다. 원심원에서 구성산을 바라보면 까마득하게 보인다. 증산이 천지공사를 행할 때 제비산 중턱에 잠시 해를 걸어 놨다는 일화가 아직도 회자되는 이곳이 구릿골이자 공식 지명으로 동곡(銅谷)이다. 이곳 사람들은 이 골짜기가 그릇을 굽는 가마골이었는데 그릇골이 구릿골로 와전되어 불리다가 일제 때 구리 동자 동곡으로 변했다고 했다. 그 증거로 도자기, 사기그릇 파편 무더기를 본적이 있고, 그 산에 가면 혹시나 하여 온전한 그릇이 없나 찾아보기도 했다.


대산종사는 원평에서 정양할 때 행선을 주로 하였다. 집에 있으면 아프고 저리고 하여 산을 갔는데 심심하여 약망태를 짊어지고 다녔다. 약뿌리가 있으면 캐고, 없으면 말고 하여 선보를 하였다. 한 뿌리도 한 망태, 두 뿌리도 한 망태, 못 캐도 한 망태가 되어 큼직하게 벌려 가지고 다녔다.


대산종사는 아마 그때를 회상하시며 구릿골 이곳저곳을 다니셨는가 보다. 화용도 골짜기를 가기위해 원심원을 지나 굽이친 산모퉁이에 이르면 조그마한 함석집이 있었다. 이곳을 몇날 며칠 지나치다가 어느 날 이 집에 들렀다. 이곳에서 25년간 홀로 지내고 있는 증산도꾼 박상래의 집이었다. 한 때는 소학교 선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이곳에 터를 잡고 수행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함석집 뒷방에 세를 내어 이곳을 왕래하였다. 이 도꾼은 홀로 독공하며 지내다 원불교 종법사가 누추한 이곳에 자리를 잡고 내왕하는 교도들을 접견하며, 이 집 주인장을 소개하니 비로소 자신을 알아주는 반가움에 고마워하였다. 이곳에서 봄가을을 보내신 후 다음 해에 원심원을 비롯하여 몇 가옥을 매입하고 정양처를 삼았다. 그 때 원남교당 원심 교도에게 내린 법문이 지금의 원심원 수도원에 걸려있다.


원심원기(圓心園記)


九聖山 於口三神山之河에 擇地定宅하니 壽富貴福慧健康으로 無量壽 無量福 無量慧가 陳陳하여 福足足 慧足足 할 것이다.


※ 養精, 養身, 養德, 養賢하고 潛心, 鍊心, 正心하여 以就工夫하면 必得如意寶珠하리로다. <대성교당>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