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의 시묘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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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의 시묘살이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1.1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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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성균 교무와 함께하는 대산종사 법문

대산종사 말년 정양 기간 대부분 왕궁의 공원묘지 영모묘원에 상주하였다. 영모묘원을 터잡기 위해 이곳 저곳을 교단 원로분들과 다니시다가 최후 낙점지로 정하였다. 처음 이 곳 터를 잡기 위해 가려다 눈이 많이 내려 못가고 향산 안이정 종사에게 풍수지리를 보게 하여 자리를 잡았다. 당신은 이미 마음으로 낙점하고 반대하는 사람을 수긍키 위해 향산을 보내 결정지게 하였다.


그 후 영모묘원은 일원사당이고 대 세계 사당이니 그곳에 공원묘지만 짓지 말고, 이리교구가 훈련원이 없으니 교구 요인들에게 그 옆에 훈련원을 지으라고 말씀하였다. 영모묘원 초창 역사는 법산 이백철 종사가 터를 고루고, 균타원 신제근 종사가 지금의 공원 같은 아름다운 공원묘지를 이룩하였다.


영모묘원이 어느 정도 터를 잡고 묘터에 잔디가 솟고 잔돌을 고를 즈음(원기72년 9월 29일) 초가을 대산종사 원평에서 이곳으로 행가하였다. 천년만년 원평에서 살 것 같으시던 대산종사 끝내 이곳에서 시묘살이를 마치셨다. 처음 이곳에 와 하신 말씀이 “선진님들이 많이 계시니 마음이 편안하다. 옛날에도 효자는 3년을 묘 옆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나도 이곳에 오니 선진님들 생각이 난다. 우리들도 매년 추석을 전후하여 시묘의 정성을 바쳐 대종사님을 비롯하여 삼세 제불제성 모든 선영, 일체 생령에게 효성을 다하여 천여래 만보살에게 대불공을 올리자.”고 하였다.


대산종사 전지 요양을 가는 곳이면 각종 불사가 따라 다녔다. 교단 역사상 각종 불사를 살펴보면 대산종사의 행적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대산종사 조석으로 대종사 성탑이 있는 총부를 향해 심고를 모셨고, 영모묘원을 매일 돌아보며 선진께 조석 문안을 드렸고, 때로는 묘터에 앉자 선을 하였고, 때로는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날에는 소창을 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법을 묻는 이에게 무언의 생사법문을 들려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 번 때를 알아 동하면 수많은 국가지도자들이 이곳을 참배하고 다녀가게 하여 비닐하우스 접견실이 세상 소식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대산종사 왕궁의 정양 생활이 익숙하기 시작할 때 옆 산을 넘어 산책하며, 수년 전 현 중앙교구에 하명하였던 일을 상기시키며 이곳 쇠솥골에 훈련원을 지을 인연을 기다리며 공을 들였다.


그러기에 대산종사의 시묘살이는 정중(靜中)에 동적인 활불상을 보이신 것이라 할 수 있고, 그 대표적인 것이 중앙중도훈련원의 불사일 것이다. 대성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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