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만 열그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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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만 열그래이!
  • 한울안신문
  • 승인 2010.01.0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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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진일화

요즘이야 깻잎이나 고춧잎으로 만든 밑반찬이 귀한 웰빙 음식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우리 사회가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던 시절 그것들은 서민들의 식탁에 물리도록 오르내린 단골 메뉴로 ‘가난의 상징’이었다.


당시 원광대학교 원불교교학과 기숙사 식당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봄날, 기숙사생들이 고추밭에 모종을 옮겨 심는 울력에 나섰다. 유난히 얼굴이 까무잡잡한 부산 출신 친구 한 명이 일을 하다 말고 밭두렁에 앉아 고추모종을 보며 구시렁구시렁하는 것이었다.


“고추나무야, 제발 고춧잎은 열지 말고 고추만 열그래이! 마 고춧잎은 묵고 싶지 않다.”


그의 말에 모두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이놈아야! 고춧잎 없이 어찌 고추를 따먹냐”하고 핀잔을 주었다. 그는 평소 고춧잎 김치만 나오면 유독 얼굴에 실망의 빛이 가득했던 친구였다.


그리고 그 해 겨울 고춧잎 사단이 나고 말았다. 식당 엄마가 고춧잎 김치가 양푼 째 없어졌다며 찾고 있었다. 범인은 바로 고추나무 타령을 하던 그 부산 친구로, 급기야 고춧잎 김치를 몽땅 쓰레기장에 버리고 그릇까지 어디로 숨겨놓았던 것이다.


이 사건의 전말은 재깍 제일 무서운 총무 선생님 귀에 들어갔고, 모두들 호된 꾸지람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엿밥에 아카시아 잎을 먹고 사신 선진님을 생각하면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는 말씀이었다. 물론 총무님은 우리들에게 더 맛있는 것을 해주지 못해 가장 마음 아파하신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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