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별기획]백년을 넘어, 원불교의 새 길을 찾다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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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별기획]백년을 넘어, 원불교의 새 길을 찾다⑶
  • 관리자
  • 승인 2016.01.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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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별기획]
▲우희종┃일본 동경대학교 약학부 석 · 박사
미국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연구강사
현)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교수
현) 바른불교재가모임 상임대표
●저서:『 생명과학과선』,『 붓다와다윈이만난다면』,
『죽음, 삶의 끝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나, 버릴 것인가 찾을 것인가』등
"서두르지 말고 원불교답게"
박대성 편집장 : 소태산 대종사께서 불교혁신을 기치로 원불교라는 새로운 종교운동을 시작한지 벌써 100년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불교는 비판받고 있다.
우희종 교수 :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왜곡이 크다고 본다. 관념적인 불교가 되어 버리고 승려와 신도가분리되었다는 점도 그렇다. 생활과 유리된 불교가 되어 버렸다. 부처님은 삶의현장을 이야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이라는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오히려 깨달아야 할 이유가 상실되어 버린 것이 지금의 한국 불교가 아닌가 생각한다.
'왜 깨닫고자 하느냐'하는 본질이 상실되어 버렸다. 불교도들은 출가건, 재가건 오직 깨달음만을 위해서 인생을 소진한다. 왜 깨달아야 되는가에 대한 고민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보니까 재가들도, 스님들도 방황하는 것이다.
한국불교는 조선시대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시기를 지나 거의 700년 만에 호황을 누리고 있다. 고려 말 이후에 힘들게 지내다가 일제시대를 거쳐서 사대문 안에 들어온 이후로 불교가 부유해 진것이 7~80년대 한국사회의 부흥과 연결됐다.
그러다 보니 관념화된 불교는 삶의 완성이라는 목적이 상실되고 넘쳐나는 물질적인 풍요 속에 매몰되었다.
물론 21세기 신자유주의의 물질적 가치관 속에서 나름대로 불교적 대안을 던지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중생들을 위로해야 할 불교가 그 본의를 망각하는 상황을 맞이했다고 본다.
: 불교와 사회 또는 종교와 사회,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가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 불가분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사회를 떠난 불교는 지적인 화려함이나 만족일 뿐이지 부처님의 원래 시각과 벗어난 것이라고 본다. 다만 사회와의 관계를 어떤 형태로 이끌어 가느냐의 고민은 필요하다.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가치를 제시하면서 한편으로 사회와 접목해야 한다.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종교인들이라면 옳고 그름을 따질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죄를 미워하고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자세가 깔려 있어야 사회 발전을 위해서 종교가 훨씬 더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현재의 한국사회는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붓다께서 지금의 한국 사회에 오신다면 어떤 행동과 목소리를 내실 것 같은가?
: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패러다임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처럼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신 분들은'삼천 년 전이나 현재의 삶의 본질이 변했을까?'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 줄 것 같다. 그런 관점으로 나와 이웃을 바라본다면 그렇게 좌절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삶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현 시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고민하며, 생의 부정적인 측면을 버리고 삶의 본질을 바라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실 것 같다.
: 원불교는 아무래도 기성종교를 거울삼아야 한다. 원불교의 백년은 불교의 백년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을까?
: 당시는 지금처럼 기록문화가 있지도 있고, 구술을 통해 결집된 1차 경전이다 보니 여러 가지로 상황이 변했을 것이다. 교단에 사람들도 많아지니 결국 의견 다툼을 통해 2차 결집이 이루어졌다.
원불교나 불교나 어느 종교건 출발 시점이 한참 지나게 되면 갈등은 생길 것이다. 그 갈등의 원인은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 비롯될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원불교도 사실 같은 유형 갈등이 생길 수 있다고 본다. 교세가 확장될수록 다양한 입장과 시각이 발생 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초심을 지키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역시 풍요로움이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많은 사람들을 욕망에 의존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원불교가 앞으로 우리 사회에 자리 잡고 세계에 뻗어나가려면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또한 중요한 것이 재정의 투명함이다. 재정을 투명하게 유지하는 것만이 교단의 생명을 잃지 않는 길이다.
: 원불교와 불교의 관계에 대하여 교단 내부에는 불법을 더 강화하자는 의견도 있고 독자적인 방향으로 가자는 의견도 있다. 우 교수께선 원불교와 불교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는게 좋다고 보는지?
: 원불교는 원불교답게 갔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참선 체험으로 보면 생명은 다양성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원불교가 불교와 많은 부분의 공통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원불교만의 고유함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특히, 불교가 25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특정 종교의 외피와 나름의 언어 등으로 몹시 복잡해졌다. 그러면서 정작 삶의 종교가 아니라 조직을 위한 종교로 전략되어 버렸다. 원불교는 삶과 교리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 점이 공감이 된다.
원불교가 굳이 불교를 표방 하지 않아도 이념과 실천은 훨씬 불교적이라고 본다. 부처의 가르침을 훼손시키고 있는 지금의 종교라는 틀에 갇히지 말고, 또 다른 대안의 모델로 원불교답게 가라.
: 원불교는 한국 사회에 어떤 의미를 던져야 하는지 조언을 듣고 싶다.
: 변방을 즐겨라. 백년은 짧은 시간이다.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백년은 1초에 가깝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 철저하게 변방의 소리를 내라고 하고 싶다. 변방의 소리라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은 소리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위치인데 원불교가 서두른다는 느낌을 받는다. 위기는 또 다른 변화의 길이기 때문에 서두르지 마라.
아울러 사상적 측면에서 초기의 부처님과 예수님의 말씀이 종교화의 거대한 흐름을 지나게 되면서 신학이나 불교학 등의 학문으로 전략되어 버렸다.
학(學)이란 것은 알음이다. 그러나 성인들의 말씀과 깨달음의 세계는 우리들의 제한된 인식을 넘어선다. 성인들의 가르침을 학문으로 정리 했을 때 이해하기 쉽고 전하기 싶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본질을 잃어버리기 쉽다.
종교를 종교답게 하는 것은 어떤 학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종교답게 행동할 때 나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불교가 내 삶과 이웃과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수 있는가를 더 주목해야 되지 않을까?
또한 잊어서 안 될 것은 종교가 사회 정의의 측면에서 가진 자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종교적 관점에서 고통이라는 것은 단순한 물질적 고통 이전에 정신적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연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우선순위에 두지만 과연 부자들은 고통이 없겠는가? 종교는 그들도 품어야 된다.
: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종교는 자모(慈母)요, 정치는 엄부(嚴父)로 비유했다 이 둘의 관계는 어떤 방향으로 설정하는 게 좋을까?
: 결국 정치라는 것은 삶의 현장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분야이다. 정교분리(政敎分離)는 양자가 관계를 끊고 무관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정치가 대중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종교는 끊임없이 조언해야 한다. 그리고 정치가들이 살피지 못한 곳을 대신 살펴서 반영하도록 하는 가교 역할을 해야 된다.
지금 각 종교 단체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권력에 아부하고 표를 주는 상황에서 정교분리라는 미명으로 정치에 무관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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