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두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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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두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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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3.04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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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튼교무의 정전산책 (65) / 방길튼 교무(나주교당)


소태산 대종사는『정전』의 ‘동포은’에서도 “자리이타의 도를 체받아서 항상 공정한 자리에서 자리이타로써 할 것”이며, ‘강자·약자 진화상 요법’에서도“자리이타 법을 써서 약자를 강자로 진화시키는 것이 영원한 강자가 되는 길”이며, “정의(正義)란 자리이타가 화(化)하는 법”(「월말통신」11호)이라 하시었습니다.



# 자리이타와 이타주의
해탈하여 다시는 윤회하는 몸을 받지않는 열반을 추구한다든지, 구원되어 이 삶에서 벗어나 천국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달리 보면 극단적인 이기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과 이웃을 버리고 열반이나 천국에 가려는 태도는 지극히 이기적인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기적 태도에 대한 반발로 이 세상을 버리지 않고 중생과 더불어 중생들이 다 열반에 들지 않는 한성불을 유보하겠다는 태도가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대승 사상입니다.



윤회 속에서 중생들과 더불어 윤회에 끌려가지 않고 윤회를 굴리겠다는 것으로, 이는 이기주의적인 열반사상에 반발하여 태동된 이타주의의 보살정신입니다.


그러나 이타주의(利他主義)와 자리이타(自利利他)는 다릅니다. 이타주의는 희생과 헌신을 중심에 두는 사상으로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인 동체대비의 입장입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성품의 차원에서는 너와 나라는 실체가 본래 없으나 현상은 인연에 따라 너와 내가 구별되는 상대적 차원입니다. 대승 보살은 이러한 너와 내가 무분별한 절대의 차원을 현실에서 그대로 실현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너와 내가 구별된 현상은 현실이기에 이러한 동체대비의 헌신과 일체가 되지 못하면 돕지 못했다는 한계와 무능력에 늘 죄책감과 미안함 그리고 좌절감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살’도 타인의 아픔에 대한 적절한 외면이 없으면 심각한 심적 고통(스트레스)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생의 고통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런 동체대비의 현실화를 기정사실화한다면 짧은 시일에 목숨을 다하는 헌신의 삶(ex.예수)이 아닌 이상 정신착란에 봉착할 위험성이 도사리게 됩니다. 이처럼 이타주의는 이상은 좋으나 현실적 한계가 있는 것으로, 소수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대중이 다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자리이타는 너와 내가 없는 절대의 차원과 너와 내가 분명히 구분되는 현실의 차원이 서로 가로지르는 입장입니다. 우리는 너와 내가 없는 하나(空性)이면서 한 편으로는 연기(緣起)적으
로 너와 내가 구별(假有)되어 있는 관계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리이타는 스스로의 주체를 세우면서 서로서로 연대하고 유대하는 관계입니다. 내가 당당히 주체적으로 설 때 그 힘으로 손을 내밀어 남도 일으켜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리(自利)는 이기(利
己)가 아닙니다. 자기의 능력을 양성하여 힘 미치는 대로 자력 없는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정전』자력양성의 강령,부모보은의 강령) 자력이 양성될 때 공도에 헌신할 수 있는 것으로, 공도헌신자는 자력을 양성한 힘으로 타인에게 기여하는 자력의 확산자입니다.


그리고 자리이타에 기반하고 있는 부모보은과 동포보은 그리고 강자·약자 진화의 요법은 절대적으로 헌신 또는 희생해야 되는 이타주의가 아니라 역량에 따라 힘 미치는 대로 무자력자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즉 타인을 위해 희생하라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함께하자는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종사님은『정전』「사요」에서‘자력양성’이라는 자리(自利)주의와 ‘공도자 숭배’라는 이타(利他)주의를 투(two) 트랙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력을 양성해야 공도자가 되고 공도에 개방될 때 자력은 건강하게 양성되는 것 입니다.


# 자리이타와 무아봉공
『정전』‘사대강령’에 무아봉공(無我奉公)이란“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자유 방종하는 행동을 버리고, 오직 이타적 대승행으로써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 성심성의를 다 하자는
것”이라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 무아봉공을 단순히 나를 없애고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것이라해석할수있으나,「사대강령」의 무아봉공은 나와 자기 가족만을 위한다든지 자유방종하지 말라는 것이지 나를 버리라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나의 삶을 잘 가꾸어서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또는 도움과 보호를 주라는 것입니다. 결국 무아(無我)의 아(我)는 자리(自利)의 자(自)를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이기(利己)의 기(己)를 없애라는 것입니다. 자리의 자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이기의 기를 버리어 봉공의 이타에 협력하고 연대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무아는 자리와 상통하고 봉공은 이타에 연결되는 것입니다. 무아봉공은 자리이타의 이타에 강조점을 둔 자리이타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즉 자리이타의 연장선상에 무아봉공도 있으며 방편적으로 자해타리(自害他利)도 포용하는 것 입니다.


정산종사는“각자의 마음공부를 먼저하는 것은 곧 불공하는 공식을 배우는 것”(권도편 13장)이라 하셨습니다. 자리를 통해서 이타하는 공식도 가능한 것 입니다. 자리를 희생해 버리면 이타의 공식
도 없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의 교법은 희생의 이타주의가 아니라 건강한 관계의 자리이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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