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과 통한의 역사, 직시와 해원을 위한 초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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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과 통한의 역사, 직시와 해원을 위한 초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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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3.1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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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귀향’을 보고┃윤명은 교도(사직교당)


영화‘귀향’을 보고 감상담을 쓰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너무나 잘 알려졌으나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전쟁과 폭력의 역사에 대한 성찰을 준엄하게 뒤묻고 있기도 하지만, 영화 속에서 담아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의 죽음과 시간들이 아직도 제대로 역사 진실 규명이나 사죄를 받지 못한 채 현재진행형으로 흘러가고 있어 더욱 그러하다.



영화의 내용은 1943년 일제강점기, 세상을 아직 잘 모르는 천진난만한 열넷 어린 나이의 정민(강하나 분)이 일본군에 끌려가 낯선 땅에서 수많은 소녀들과 함께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어 ‘위안부’로 살아야 했고, 끝내 전쟁의 범죄 속에서 죽음을 당해 돌아오지 못한 이야기를 담았다.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실화를 바탕으로 치욕과 통한의 역사를 그려내며, 우리가 직면해 왔으나 직시하지 못했던 부분을 영화 속에서 뚜렷하게 바라보도록 하고 있다. 일본군에게 끌려갈까, 전쟁 범죄의 소모품으로 팔려갈까,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를 외쳐야 했고, 전쟁터에 끌려가 폭력과 생사를 넘나들면서“여기가 지옥이다 야!”를 경험해야 했으며, 아수라장의 생지옥에서 살아 돌아와서도 “미치지 않고서야 그것을 그런 과거를 누가 말하겠어?”라는 세상의 모멸의 시간을 견뎌야
했던 조선 소녀들의 삶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고향으로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고 있는 한 맺힌 조선 소녀들의 영혼까지 우리 앞으로 불러내와 만나게 한다. 그리고 나를 비롯해 영화를 보는 누구에게나 말로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의 기억들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소리 없이 강렬하게 묻는다.



조정래 감독은 이 영화를‘죽음의 기록, 산 사람들의 기록,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증거물’로 삼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 때문인가, 우리에게 기억의 고통과 마주하고 분노와 슬픔을 승화하면서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도록 직시하는 과정에 동행하기를 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분노와 통한의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거나 살아 있어도 산목숨이 아닌ㅜ 이들을 우리의 기억 속으로, 현실 속으로 하나하나 불러내 해원과 상생의 몸짓으로 안아내고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걸 그냥 느끼게 해준다.



연기자들의 미흡한 연기, 영화의 완성도와 문법, 편집과 연출의 껄끄러움 등 영화에 대한 많은 논란과 비판을 감안하더라도, 영화를 보다 보면 감독의 심정과 의도를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
할 수 있다.


실제 우리 안에서도 부끄러운 역사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로 묻어두려는 이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고, 반인륜적 전쟁 범죄를 저지른 일본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심 어린 사죄는커녕 역사 왜곡을 거듭 하면서 반한(反韓), 혐한(嫌韓) 등의 소재를 공공연히 사용해 오고 있는 현실에서‘귀향’이라는 영화가 주는 의미는 매우 특별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나를 비롯해 이 영화를 본 사람들한테는 그렇다고 믿고 싶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제의 만행과 전쟁으로 말미암은 폭력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직시하는 기회가 되고, 평범한 이들이 단순히 분노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들과 함께 역사의 진실과 정의를 바로 세우며 평화를 실현해 나가는‘기억의 역사’를 새기는 과정으로 삼기를 바란다.



그리고 마침내 나비의 날개를 빌어 혼이 되어 돌아올 우리들의 잊혔던 수많은 누이들, 소녀 정민이“그래, 밥 묵자”하면서 이 땅에서 편안히 쉴 수 있는 자유와 평화의 그 날이 어서 오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다. 그것이 영화‘귀향’이 우리에게 건네는 의미라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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