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특별기획] 사회적 치유, "보살심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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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특별기획] 사회적 치유, "보살심을 향하여"
  • 관리자
  • 승인 2016.08.18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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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2세기, 이제는 0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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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에서 단기 출가를 하고, 수행센터에서 일 년 이상을 생활하다 왔다는 중년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 회사에서 명상 지도사로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욕심 없어 보이는 눈빛은 그의 수행경력을 증거 하는 것이었고, 나는 그 눈빛으로 인해 그를 신뢰했다.

그는 한 때 큰 회사의 대표까지 지냈는데 어느 순간삶에 회의를 느껴 한국의 생활을 다 정리하고 미얀마를 갔다고 했다. 그는 수행을 통해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알았다며, 마음 챙김과 알아차림(사티)을 깨우치고 나니 특별히 분노할 일도, 짜증을 낼 일도, 서운할 일도 없노라고 편안하게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관계 속에서 생겨났다. 함께 일을 하다보면 갈등도 생길 수 있고 또 그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관계는 더 강화되거나 악화될 수가 있는 것인데, 자기 수행을 통해 갈등에서 초연한 법을 배운 그이는 역으로 상대에게 두 배의 갈등적 스트레스를 안겨주고 있었다. 다시 말해, 어떠한 일로 의견 대립이 생겼을 때, 상대방은 “나는 이러이러한 일로 마음에 상처를 받았고 선생님이 이렇게 이렇게 말할 때 아주 서운했습니다”라고 말을 하면, 미얀마 수행자께서는 “저는 전혀 화가 나거나 서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화를 내고 있는 나와 서운해 하는 나를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고, 결국 상대방은 혼자 씩씩거리는 덜 떨어진 인간이 되고 말았으니, 미얀마 수행자가 편안한 딱 그만큼 관계의 갈등은 곪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개인의 해탈을 궁극의 목표로 삼는다는 소승 불교적 수행법을 그이가 잘못 오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만 편안하고, 나만 초연하면 되는 것이 소승불교의 수행적 목표일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돈을 아낀다는 이유로, 밥과 차와 술을 몽땅 친구에게 부담시키는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 내 돈은 남겠지만 친구 돈이 더 많이 쓰여 진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짓이지 검소한 절약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조계종 교육원장으로 재임 중인 현응 스님은 그의 책「깨달음과 역사」에서 대승불교의 실천적 주제인 '보살'에 대해 선명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보리(보디)'는 연기적 존재를 이해하는 깨달음이고 '살타(사트바)'는 그것이 구체적인 상황과 역사에 적용된다는 뜻이라며 '보리살타'를 줄여 '보살'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좀 더 쉽게 풀어 본다면, 세상은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는 것이라는 연기적 깨달음을 이해하고 내 역사와 우리 사회와 작금의 정치적 상황의 옳고 그름을 정확히 분별하고 이에 실천적으로 대응할 때 이것이 보살심이며 진정한 대승불교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보살심은 연결성을 인정하면서 생긴다. 그래서 보살심의 세계는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화엄의 세계, 우리는 다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관계의 세계, 모든 존재는 그물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있다는 인드라망의 세계이다. 그것은 소승과 대승의 구별 없이 모든 불자들이 향해야 하는 마음이며
기독교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를 통해 보살심을 설명한다.

불법의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를 기치로 태동한 혁명적인 종교, 원불교 역시 사은(四恩)을 통해 보살심을 설법한다. 천지, 부모, 동포(현대의 용어로는 인류), 법률이 베풀어 주는 은혜가 없다면 존재는 살아갈 수 없으니 늘 서로에게 보은하라는 것이 바로 보살심이다.

개인의 치유는 사회적 치유와 함께가야 한다. 위빠사나 명상이나 사마타명상처럼 경전 속에서의 붓다의 수행법을 따라하며 지혜와 평화를 얻고 아라한이 되는 것이 명상의 궁극일 수는 없다. 면벽 수행을통해 여여한 사념처의 알아차림을 한 들 그곳이 골방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저 개인의 깨달음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세속에 나오는 순간 다 깨질 만큼 허약하다. 마음챙김을 통해 자유를 얻었다면 이제 그것은 나를 넘어서 사회와 세계를 향해 확장해야 한다.

내 이웃을 챙기는 보살심과 자애심, 정의롭지 않은 것에 준엄하게 저항하는 시대정신이 항시 함께 할 때, 이것을 건강한 수행이며 미래적 치유문화의 한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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