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청년평화학교 지상강의 2강] 역사 : 내가 겪은 전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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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청년평화학교 지상강의 2강] 역사 : 내가 겪은 전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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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8.30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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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평화교육센터 종교청년평화학교 지상강의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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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정말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날이 왔어요. 그 때 일본인 학교에서 산에 올라 소련군 탱크를 빠트릴 구덩이를 파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라디오를 가지고 오시더니 틀어 주시더라고요. 라디오에서 일본 천황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항복을 했다'라는 목소리, '2차대전이 끝났다'라는 이야기였어요. 기쁜 표정을 했다가는 맞을 것 같아서 슬픈 척을 하다 선생님의 해산소리에 바로 집으로 뛰어갔어요. 아버지와 나는 보자마자 서로 만세를 외쳤죠. 해방만세! 광복만세! 조선만세! 그리고 바로 짐을 싸서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죠"

"그러나 기쁨도 잠시, 만주에서 고생하신 어머니는 폐결핵에 걸려 돌아가셨어요. 나는 그때 커서 절대 가족을 굶기고, 고생시키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것 같아요. 어머니 없는 삶은 너무나 힘들었죠. 장남으로서 줄줄이 있는 동생에, 아버지까지 챙기는 일이 너무 힘들었어요. 전학 와 다니고 있던 중학교는 점점 빨간 깃발로 덮여갔습니다.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해방자 소련군대만세'라는 깃발이요.

북한의 공산당은 모든 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어요. 북한사람들은 남한군과 미군이 공산당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줄거라 믿었어요. 며칠 후 평양상공에 미국 비행기가 뜨자, 평양의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박수를 치며 미군을 반겼죠. 그러나 미군은 박수를 치고 있는 민간인들을 구분하지 못하고 군중을 향해 기관총을 쐈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죽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게 전쟁이에요. 그렇게 전쟁이 시작됐어요. 군대에 끌려가기 딱 좋은 나이였던 저는 교회 밑 땅굴에 숨어있었어요.

그런데 가정방문을 나가셨던 아버지가 집에 안 들어오시는거에요. 걱정이 되어 땅굴 밖을 나왔는데 그대로 덜컥 인민군에게 붙들렸어요. 신체검사장에서 시골에 숨어있다 걸려 끌려온 내 남동생도 만났죠. 저는 천운으로 불합격을 받아 나왔는데…. 남동생은 그러지 못했어요. 그날 나 대신 잘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긴 남동생의 얼굴이 마지막이였어요. 그날 이후 지금까지 소식이 없어요.

동네에 돌아와 신자들과 함께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버지를 찾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대동강 하류에서 아버지 시체를 찾았어요. 목사님 다섯 분이 한 밧줄에 묶여 총살을 당해 있었죠. 아버지 얼굴, 가슴, 온 몸에 따발총 자국과 핏자국이 있었어요.

뭐라 말 할 수 있겠어요? 이 원수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 말 밖에는 그 당시에는 그 생각 밖에는 들지 않더라구요. 하나님의 은총인지 저는 다행이 남한으로 피난을 와서 지금까지 살아있고,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어 공부도 하고 나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죠. 허나 나와 같은 이 늙은이들이 자란 세대는 분노와 의심의 시간들이었어요. 우리는 통일을 이룰 수 있는 힘도 없고 이루기에는 너무나 많은 분열이 있죠.

이 사람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할아버지들이 가지고 있는 소원은 여러분들이 아들, 딸 그리고 그 손주, 손녀를 볼 수 있는 것. 그리고 평양에 신의주에 만주에 강계에 마음 놓고 기차를 타고, 또 운전을 하고 갈 수 있는 그런 평화의 세상이 오는 거에요.

젊은이 여러분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패러다임, 꿈, 생각, 철학을 가지고 여러분들 인생을 계획하고 한국민족을 위해서 희망을 가지고 공부하고 일해 줬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할아버지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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