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행] "평화와 화해의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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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행] "평화와 화해의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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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8.31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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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화해의 길을 걷다(1)

제2차 세계대전 전후 71년, 서울평화교육센터의 제4기 종교청년평화학교 청년들이 우리나라와 일본의 근현대 역사적 관계와 문제들을 마주하려 가깝고도 먼 일본 땅을 밟았다.
우연치 않게도 이 날은 우리나라와 달리 양력으로 절기를 세는 일본에서 견우와 직녀가 1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다는 칠월 칠석, 목요일이었다.

# 편견에 갇혀있던 부끄러운 자신을 보다
'고쿠라'는 제국주의 전쟁의 병참기지였으며,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끌려와 강제노동을 한 공업지대였다. 그 역사의 현장들을 눈으로 보기 위해 우리는 후쿠오카 공항의 맑은 날씨를 감상할 틈도 없이 버스에 올라 고쿠라로 향했다.

고쿠라 지역에서 가장 처음으로 들린 곳은 와카마츠 마을의 작은 사찰 '극락사'. 높은 천장, 곧게 뻗은 밤색 나무기둥과 다다미 바닥, 골골거리는 오래된 선풍기가 따뜻한 햇빛과 함께 어울려 소박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불단을 보면 섬세하고 화려한 금빛의 향연이 펼쳐져 마치 수행의 공간과 극락의 공간으로 나누어진 것만 같았다.

극락사의 주지스님은 처음보는 우리를 반겨주시며, 동시에 사과의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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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라 한인교회 주문홍 목사님과 극락사 주지스님

“와카마츠는 과거 제철기업이 있던 커다란 도시였다. 그러나 수많은 조선 이주노동자들이 죽어 나갔던 불행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여기서 오랫동안 살아온 나는 상당히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조선인들을 눈으로 보며 살아왔다. 또한 극락사가 속해있는 정토진종은 과거 일본의 전쟁에 협력을 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도 했던 그런 쓰라린 역사를 가지고 있는 종파이다.

일본은 정치적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역으로 이용하여 불교를 싸움의 도구로서 사용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것에는 우리의 책임도 있다. 그런 과거의 역사를 늘 부끄럽게 생각해 왔다.

금번에 한반도에서 평화를 생각하는 젊은 청년들이 이 누추한 절을 찾아 준다하여 정말 영광스럽기도 했지만 정말 미안했다. 정말 미안하다.”

처음 본 일본스님의 '미안하다'는 사과에 머리가 멍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의 사과를 받다니. 이러한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진심으로 반성하는 일본 사람을 실제로 본 것은 우리에게 가히 충격이었고, 그것은 편협하고 막연하기만 했던 일본사
람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에 금이 가게하는 첫 번째 망치질이었다.


#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역사를 보다
살짝 간 금의 틈새를 벌려 놓는 일은 곧바로 오다야마 묘지 그리고 영생원(永生園, 고쿠라 한인 교회의 故최창화 목사가 중심이 되어 건설한 납골당)에서 이어졌다.

와카마츠 마을의 어느 시립 묘지 안, 반듯한 일본인들의 가족 묘석을 지나가다 보면 좁고 가파른 계단 하나가 나온다.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풀이 무성한 조그마한 땅에 하얀 울타리가 쳐져있다.

그렇다. 이곳이 바로 묘지이다. 봉분 하나, 개인 비석 하나도 없이 솟대와 조선인 조난자위령비석 하나 있는 이곳이 80여 명이 넘는 조선인들의 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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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이 되자마자 일본 땅을 벗어나기 위해 작은 배에 몸을 실었던 조선인들. 그러나 기구한 운명의 그들은 죽어서조차 고향에 가지 못했다. 그들은 태풍으로 인해 현해탄에서 시체가 되어 다시 일본 해안가로 쓸려왔고 이곳에 집단매장 됐다.

이곳이 알려진 것은 불과 30년. 위령비석과 설명문이 세워진 것은 기타큐슈 시의 시민운동가들의 노력으로 고작 10여 년 전이라 한다. 일본근대사 연구가이자, 시민운동가이신 가와모토 목사님의 이러한 설명은 일제시대의 피해를 거시적으로만 보아왔던 우리에게 커다란 반성을 느끼게 했다.

뒤이어 간 영생원은 일제 강제 연행 문제와 재일 조선인들의 인권운동에 헌신해 온 故최창화 목사가 방치되어 있던 강제연행 조선인들의 유골을 모아 안치한 곳이다. 대부분 신원을 알 수 없는 강제연행의 희생자들이거나, 유가족을 찾지 못한 이들이다.

불명(不明), 무명(無名), 이름 없이 죽고, 어린나이에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직접 보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역사를 보며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었고, 무엇을 하고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생원의 이름없는 유골들

내려가는 길목. 동포들이 심어 놓았다는 무궁화를 오래 바라보지 못한 채, 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우형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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