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악기 부럽지 않은 명품 보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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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악기 부럽지 않은 명품 보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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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11.02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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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유행가」⑫ㅣ 조휴정(수현, 강남교당) PD '함께하는 저녁 길, 정은아입니다' 연출

정훈희의 '소월에게 묻기를'

정훈희.jpg

라디오 피디인 저는 목소리에 민감합니다. 목소리 하나에 의지하는 라디오가 진심, 품성, 기분 심지어 실력까지도 더 정직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저에게 목소리 하나로 첫 번째 충격(?)을 준 사람이 정훈희입니다.
지금은 없어진 명동의 차이나타운에 영화잡지를 사러 늘 다녔는데, 거리에 나와 있는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던 노래를 들은 겁니다. “아아아아아~ 아아아아~”단순한 허밍인데도'어, 이 목소리는 뭐지?'귀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거죠. 가늘고 꾀꼬리같이 청아하긴 한데 지금까지 들었던 신카나리아 선생님 스타일의 옛스런 간드러짐이 아닌, 칼로 베일 것처럼 정확한 음정에 실린 모던한 청아함에 홀려 그냥 그 자리에 서서 노래 한 곡을 다 들었습니다.
그 노래가 정훈희의 '안개'였습니다. 보통 저렇게 콧소리가 섞이면 청승맞거나 애교가 넘치거나 절절해야 하는데 오히려 약간 도도하고 무심한듯한 감정표현이 반전매력이랄까, 기름기 싹 뺀 원래의 싱싱함, 세련됨이랄까, 아무튼 정훈희는 등장부터가 남달랐습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정훈희의 모습이 또 하나 있습니다.

1975년의 칠레 가요제인데요. 그때는 그런 국제가요제에도 애국심이 어찌나 고취되던지, 열정적으로 지휘하던 이봉조 선생님과 한복을 아름답게 차려입은 그녀가 부르던 '무인도',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지 않을 때였는데 그 큰 무대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노래를 갖고 놀던 여유와 실력! 외모로도 전혀 뒤지지 않는 정훈희를 보면서 어린 마음에 얼마나 자랑스럽던지 감동받기 좋아하는 저는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그 대회에서 3위에 입상하고 최우수가창상을 받은 것은 너무도 당연했죠.
도대체 저 멋진 여가수는 어디서 나타난 걸까요. 뉴욕이나 밀라노에서 온 것처럼 서구적이고 새침한 모습. 고급진 저 목소리와 흠잡을 데 없는 노래 실력. 그 바탕은 역시 핏줄입니다. 가수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 '히식스'의 멤버이자 기타리스트인 큰 오빠 정희택 등 집안 자체가 남다릅니다.
송창식은 “한국의 모든 가수 중에 음정과 박자가 가장 정확하다”고 정훈희를 평했습니다. 엄청난 찬사인 셈이죠. 그녀의 실력은 후배들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작곡가이자 가수인 윤상도 자신이 부르기엔 너무 벅차다며 '소월에게 묻기를(2004년, 윤상 작곡, 박창학 작사)'을 정훈희에게 헌정했습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말없이, 말없이, 말없이... 알 수 없네, 난 알 수 없네. 이제 왜 살아가야 하는지. 산산히 부서진 세월들이 어디로 나를 데려가는지. 가르쳐 주오, 왜 당신은 저 꽃잎을 밟으려 하는지.”

이별의 아픔이 극으로 치달을 때는 사포로 살짝 긁어낸 것처럼 한숨 섞인 쇳소리가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듣다보면 윤상이 왜 이 노래를 정훈희에게 주었는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월 속에서 딱 알맞게 굵어진 그녀의 목소리에 실린 장중하고 클래식한 이 노래는 윤상이 만든 곡 중에서, 정훈희가 부른 노래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자 한국가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고 확신합니다.
'꽃길', '꽃밭에서', '그 사람 바보야', '진실', '강 건너 등불', '우리는 하나', '무인도', '안개', 그녀의 실력에 비해 히트곡 숫자가 아쉽지만, 다행히 정훈희의 목소리는 아직 짱짱합니다. 그녀가 리메이크한 '사랑이 지나가면'을 듣다보면 오래오래 우리 옆에서 명곡들을 다시 한 번씩 불러 주기만 해도 참 행복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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