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상 진리’의 구조와 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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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 진리’의 구조와 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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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11.25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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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튼교무의 정전산책 (82) ㅣ 방길튼 교무(나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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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원상 진리'는 진공체와 영지의 광명 그리고 묘유의 조화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없는 자리의 진공체와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나타나는 면 그리고 진공묘유의 조화로 은현자재하는 면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를 삼대력(三大力)과 연결하여 진공체는 수양력에, 영지의 광명은 연구력에, 묘유의 조화는 취사력에 관계 짓고 있습니다.(『교전공부』) 다만 수양력, 연구력, 취사력은 성품을 3분한 것이 아니라 세 관점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수양력이 성품 전체이면서 연구력과 취사력를 머금고 있으며 연구력과 취사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경의편 15장)
즉 일원상의 진리는 삼층 구조가 아니라 세 측면에 따라 바라본 기능입니다. 진공체가 영지의 광명과 묘유의 조화를 머금고 있는 것으로, 진공체는 일원상 진리의 3분의 1이 아니라 전체입니다. 영지의 광명과 묘유의 조화도 마찬가지로, 일원상의 진리는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입각지에 따른 기능입니다. 기능의 다른 측면은 있으나 존재 자체가 다른 것은 아닙니다.
「교리도」의 '진공묘유의 수행문'에서 진공(眞空)과 묘유(妙有)도 존재를 양분(兩分)한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양면(兩面)입니다. 일심(一心)은 주의하는 대상 이외에 일체가 없는 마음(空)이면서 주의심으로 꽉 찬 마음(有)입니다. 단전에 집중하는 주의심을 성성(惺惺)이라 한다면 그 마음 외에 일체가 없는 것은 적적(寂寂)입니다. 공적영지(空寂靈知)라 할 때 모든 것을 신령하게 아는 영지의 마음이 그대로 일체가 떵 빈 적적한 마음인 것입니다. 거울 자체가 늘 비어서 무엇이든 앞에 오는 것을 비출 능력이 있듯이 텅 비었으되 일체를 비출 능력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존재의 전체가 진공이면서 또한 묘유입니다. 진공이 묘유요 묘유가 진공이며, 진공이 묘유를 머금고 묘유가 진공을 머금고 있는 것입니다.
『정전』「무시선법」을 보면 “진공으로 체(體)를 삼고 묘유로 용(用)을 삼아”라 하며, 진공으로 체를 삼는 방법은 “밖으로 천만 경계를 대하되 부동함은 태산같이 하고, 안으로 마음을 지키되 청정함은 허공과 같이 하여”로 묘유로 용을 삼는 방법은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하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공이 묘유를 머금고 묘유가 진공을 머금는 상태이므로, 삼학의 정신수양은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는 것이며, 사리연구도 진공의 체에 바탕한 용이며, 작업취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분별(=연구력)이 항상 정(=수양력)을 여의지 아니하여 육근을 작용하는 바(=취사력)가 다 공적영지의 자성에 부합될 것”이라 귀결하며 “이것이 삼학을 병진하는 공부법”이라 총괄한 것입니다.

「교리도」의 '인과보응의 신앙문'에서 인과보응은 불생불멸의 다른 모습입니다. 생멸 없는 도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는 서로 바탕되어 있습니다.(서품 1장) 이는 두 물건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한 존재를 보는 두 측면이 호상침투 되고 원융무애 되는 경지입니다. 생멸이 없이 길이 길이 돌고 도는 것이며(인과품 1장) 생사가 원래 둘이 아니요 생멸이 원래 없는지라(천도품 3장) 생멸 없는 진리 가운데 한량없는 생을 누리는 것입니다.(천도품 14장) 불생불멸의 또 다른 모습이 인과보응입니다.

2. 일원상 진리를 진공·광명·조화로 3분하든 아니면 진공·묘유로 2분하든, 불생불멸·인과보응으로 대별하든 모든 구분의 단락 단락은 독립된 일단락이 아니라 각각의 단락이 주체가 되어서 나머지 단락을 머금는 하나입니다. 각 단락들이 호상침투하고 있으며 원융무애한 하나의 자리라할 것입니다. 이처럼 일원상 진리 자체가 하나의 다른 작용이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으로 투영되기도 하고 수행의 표본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때와 곳과 일의 성질에 따라 수행문에 주체를 두고 신앙문을 머금는 경우도 있고 신앙문에 주체를 두고 수행문을 머금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병행·병진은 개체가 다른 것을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다른 방식을 통합·회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진리에 근거한 수행은 동시에 신앙이 되어야 하고 신앙은 수행과 회통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타력 병진 신앙인 것입니다.(신성품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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