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안 오피니언] 소태산 평전을 읽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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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 오피니언] 소태산 평전을 읽고(1)
  • 관리자
  • 승인 2016.12.21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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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구치소 이○○님

이 글을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이○○님이 「소태산평전」을 읽고 보낸 글입니다.

내가 처음 원불교를 접하게 된 것은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면서이다. 인생에 있어 지금의 현실이 용납되지도 이해되지도 않는 순간이었기에 지나온 나의 삶을 다시 반추하게 됐고, 이 세상의 이치를 근본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원불교 법회에 참석을 하게 됐다. 교전을 봉독, 필사하면서 인생의 전환 시기를 만들어 주신 원불교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됐다. 사실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님의 평전을 읽고 감상문을 제출하라고 하였을 때 나의 얕은 지식을 뽐낼 기회가 된 것 같아 잘 쓰고자 평전을 두 번, 세 번 읽었지만 통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또한 나에게 더 깊은 깨우침을 주기 위한 사사불공(事事佛供)이 아닌가 싶다.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어느새 내 머릿속의 탐진치(貪瞋痴)는 사라지고 구도행을 하시던 소태산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겹쳐졌다. 마음에 일던 욕심은 어느새 사리지고 그렇게 느끼고 싶고 깨닫고 싶었던 것이, 그제야 제 모습을 드러내며 나를 일깨워 주기 시작했다.
현세 즉 살고 있는 지금 현실 속에서 경전을 찾으라 하시며 진리의 관념성을 탈피하신 대종사님의 가르침을 일상을 통해 전해주신 것이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1916년 4월 28일 대각 구도하실 때 “알지도 못하면서 숱한 문을 두드렸다. 이제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게 되었을 때 그 문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수많은 날은 스스로 시험하고 애쓰고 갖은 방법을 동원해 알고자 해도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가? 바로 그 노력이 가로막고 있었다. 찾으려는 욕망이 장애물이었다.”말했다.

나는 평전의 독후감을 쓰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대종사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이었다. 평전이라는 것은 위대한 성인들의 일대기를 위인전처럼 집필한 것이다.
나는 소태산 평전을 통해 우리에게 대종사님께서 가르쳐주시고자 한 메시지, 즉 대종사님은 스스로 신격화하는 것은 일체 거부하시고 세상의 진리를 가르치시고 중생을 구도하는 원불교를 창시하는 창시자로 남고자 하신 것이라 느꼈기에 나와 같은 초심자들의 이해를 돕는 것으로 내가 받은 은혜를 보은하고자 한다.
인간이 태어나 사회에 속하고 살아감에 있어 종교는 때로는 통치의 수단으로 대중을 이끌기도 하고, 우주의 대자연 앞에 미약한 인간이 기댈 수 있는 치유의 수단이기도 하였기에 절대적 존재의 신에게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을 위한 기복 신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태산께서는 깨달음에 이르시는 과정에 원불교의 연원을 불교에 두게 되는데 이는 반야경전의 한 부분인 금강경을 읽으시고 큰 깨달음을 얻으시면 서다.
보살이란 일체의 차별주의를 거부하는 일승(一乘)인 것이다. 일승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만의 혹은 내가 속한 어느 집단만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일체의 구분의식이나 우월의식이나 특권 의식의 거부를 말하는 것이다. 대승의 의미는 능단(能斷) 금강의 지혜의 실천, 곧 금강경이 설하는 지혜를 실천하는 자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우리에게 불경의 교리를 뛰어 넘어 앞으로 다가 올 세상에서 우주의 구성원인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해야 타자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참된 인연을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서로의 존재 경로를 지속하며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지를 실천하는 종교를 창시하셨고 후천 종교 후천 개벽의 문을 여신 선지자 이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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