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한울안이 만난 사람] 이전과는 다른 의미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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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한울안이 만난 사람] 이전과는 다른 의미의 종교
  • 관리자
  • 승인 2017.02.1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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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성 교무(본지 편집장, 이하 박) : 최근에 일어난 촛불집회를 통해 집단지성이 최대한 발현된 시기가 도래했다고 본다. 앞으로 '나는 특정종교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영성적'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등장할 것으로 본다.
종파적·제도적 종교의 기능이 점차 약화되며 이와는 상반되게 개인적 영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성해영 교수(이하 성) : 이번 종교인구조사에서 종교가 없다고 밝힌 56%의 인구가 과연 완전한 무종교인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극단적인 무종교인 또는 무신론자는 전체 인구의 2%도 안될 것이라고 본다.

이 56%는 종교성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영성을 충족 받지 못해 기존의 종교를 관망하거나 자기 방식의 의례, 경전 또는 종교적 세계관을 통해 위안을 받고 있다고 봐야한다.
예를 들어 천주교인들 가운데 불교인들 보다 윤회론을 믿는 비율이 더 높다는 한 조사 결과도 있다. 제도화된 종교의 틀 속에 속해있어도 그 개인은 제도가 규정하거나 붙잡을 수 없는 고유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조직 안에서는 그 종교의 교리나 전통체계를 충실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원불교에서는 신비체험과 신통력을 표현되는 영적인 힘에 관한 강한 저항도 존재한다. 그러나 종교성을 찾는 여정에서 이것을 마냥 터부시할 수만은 없다고 본다.

: 신비체험에 대한 올바른 앎이 있어야한다. 이는 양날의 칼과 같은 것이다. 대종사님도 제세 시에 미래에 대한 전망과 특별하고 놀라운 이적(異蹟)과 영력(靈力)을 보이신 사례도 많다. 그러나 궁극적 실제와 합일되는 체험 말고도 이적과 신비적 능력이 윤리적 개인으로 충분히 성숙해 가지 못하는 과정에서 접하게 됐을 경우, 개인의 에고를 팽창시키고 주변사람들을 망가뜨리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 많이 봐왔다. 그래서 종교조직과 제도의 입장에서는 이를 조심해 온 것이다.
종교적 활동의 목적이 나와 주변 사람들이 더불어 잘 살자고 하는 것인데 내가 남들 보다 우월하고 초자연적인 영력을 확보하는 것이 수행의 정도가 되어 버린다면 정말 위험하고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고 반대로 신비체험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논의와 탐구를 아예 멈춰 버린다고 해서 이런 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논의해서 신비체험의 유형과 여기에 따른 위험에 대한 분별과 발생 내용을 큰 틀에서 알게 된다면 신비체험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이 없어질 수 있다.

불교의 경우에도 깨달음을 체험을 하겠다고 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개인적 체험에 대한 성찰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해하고 유지되어 왔을 것인가?

또한 개인의 종교적 체험은 앞으로도 중요한 영역이겠지만 공동체 차원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체험 역시 굉장히 강력한 것이다. 그래서 집단이 함께 즐거워하는 부흥회 등의 종교 집회를 통해 나를 잊어버리는 마음 상태로 이끌어 가는 종교적 의례가 당연히 있어야한다. 그것이 없으면 종교가 성립될 수 없다.
망아(忘我)의 체험이 집단적차원에서 일어나게 되면 한 개인이 훨씬 빠르게 자아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집단에 몰입되게 된다. 그래서 양날의 칼인 것이다. 종교 조직과 지도자 등이 속한 공동체에 완전하게 개인의 의지와 주체성, 권한을 다 포기해 버리고 심리적 위안을 얻게 되어 히틀러의 나치와 같은 극단적인 사례도 벌어지겠지만 반대로 보면 이러한 체험이 없이는 인간이 살아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종교조직은 그와 같은 체험을 이끌어내야 한다. 종교가 너무 이성적·합리적 영역만을 이야기해서 투명하고 맑게 존재하는 것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
촛불집회에 나가서 집단으로 노래하고 구호를 외치며 한 목소리를 낼 때, 개인은 자기 경계를 넘어 우주적 힘을 느끼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경험을 한다. 인간이 공부를 할 때 이성적으로 열리는 것이라면 보편적 차원과 접속하며 자기를 확장시키는 것이라면 촛불 집회와 같은 대중 집회는 머리를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 감정, 정서, 존재 자체가 열리는 체험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또 하나의 종교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 원불교가 시대에 무엇을 던져 줄 것인가도 중요한 화두지만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의견과 학문을 받아들이기도 해야 한다고 본다. 대종사님께서 최초법어를 통해 '시대에 따라 학문을 준비하라'고 강조하셨지만 교단이 변화의 흐름을 거부하고 보수적으로 굳어지는 부분도 없지 않다고 본다.

: 원불교의 가르침 이전에 내가 아는 교무님들이 다들 좋은 인상을 줬다. 세상에 살고 있는데 이 세상을 벗어난 것 같은 고결하고 균형 잡힌 태도를 갖고 있다. 입만 열면 좋은 소리를 하는 대놓고 종교인과 같은 과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원불교는 대종사님 말씀처럼 인간이라는 존재자체가 영육을 쌍전해서 온전하게 균형 잡힌 중용을 이뤄야 하며, 일상과 수행이 둘이 아닌 온전하게 통합된 삶을 살도록 강조하고 있다. 정상적으로 살기 힘든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사는 교무들의 모습이 오히려 낯설 정도다.
이상과 현실, 수행과 생활, 성과 속을 결합시킨 종교들이 현실에서 크게 번성하지 못했다. 소위 말법시대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안타깝다. 제대로 된 시대가 오게 되면 원불교와 같은 정상적인 균형을 갖추다보니 소수가 된 종교들이 자신들의 가르침을 크게 펼칠 수 있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본다.

그렇기 위해서는 역사에서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양극을 통합한 균형을 갖춘 새로운 종교로써 시대가요청하는 과제에 해답을 주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임무와 소명이 원불교에게주어졌다고 본다.
이것을 위해 남의 이야기를 정말로 열심히 많이 들어야한다. 그러다보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알게 된다. 하나의 조직으로 존속하면서 사회적으로 기능과 역할을 해야 하므로 세상과 사람들이 무엇을 요청하는 지를 답을 주기 위해서는 많이 들어야 한다.
소태산 대종사님의 가르침 가운데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와 같은 말씀처럼 21세기를 지향하는 좋은 말씀이 없다고 본다. 백 년 전 전기도 없고 자동차도 안 다니던 시대에 영광과 같은 시골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명확한 통찰과 비전을 갖고 계셨는지 반증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물질이 얼마나 더 많이 개벽되겠는가. 원불교는 대종사님의 그 말씀대로 해야 한다.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간의 직업은 점점 사라지지만 사람들이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다양한 생산물이 쏟아질 것이다. 이런 시대에 인간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제는 정신, 영적인 차원, 인문학적 차원, 문화·예술의 차원, 초월적 세계에 대한 담론, 인간존재에 대한 가능성, 창조와 상상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공유하고 즐겨야하는 것 말고는 인간이 할 일이 없게 된다.
'케이팝 스타(K-POP STAR)'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30년 전만 하더라도 소위 '딴따라'라고 천시되고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 지금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면서 '인간이 부르는 노래가 이렇게 아름답구나'하는 생각과 마치 이 세상에 없는 듯한 기분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인간에게는 신이 준 지성과 사랑의 힘이 있다. 이것을 완벽하게 구현시키면 얼마나 놀라운 존재가 되겠는가. 모든 종교의 선구자들이 말한 사실은 인간이 물질에 갇혀 사는 존재가 아니라 대단한 잠재력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의 계발을 통해 함께 즐거워하고 행복 하라는 것이다.
21세기의 종교는 이전과는 다른 의미의 종교와 영성을 이야기해야 한다. 무엇을 하면 된다, 안 된다는 강제와 제한을 가지고 종교를 이야기하면 안 된다. 남을 해코지하는 것은 당연히 금해야 되는 것이지만 주어진 틀을 넘어서 자신의 행복을 어떻게 더 숭고한 차원으로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 물질이 개벽되는 과정에서 엄청난 일들 일어날 텐데 정신이 개벽되는 상황에서는 얼마나 더 많은 내용을 벌어지겠는가?
백 년 전, 오백 년 전, 천 년 전의 가르침을 그저 따라가겠다는 태도는 창조가 아니다. 시대에 따라 새로운 학문을 통해 배우고 나아가는 것이 바로 창조다.
앞으로 원불교가 한국사회에 이성과 감성이 골고루 만족되는 중용의 상태를 모색하고 구현하고 실험하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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