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시생활(彿法是生活)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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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시생활(彿法是生活)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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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2.1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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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튼 교무의 정전산책(87) ㅣ 방길튼 교무(나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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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교전』앞 장에 표어로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이 등장합니다. 불법이 곧 생활이며 생활이 곧 불법이란 뜻으로 불법의 시대화·대중화·생활을 함축한 표현입니다. 그리고《정전》「사대강령」중의 하나인 '불법활용'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 불법시생활은 불법과 생활의 간격을 무화(無化)시킵니다. 이는 재가·출가의 간격을 없애 버린 것이며 출세간법인 불법과 세간법인 생활을 회통시킨 것으로 진리의 영역인 불법이 고락의 영역인 생활로 내려왔다 할 수도 있고, 아예 그 구분의 줄을 지워버려 생활 그 자체가 그대로 불법이 되도록 한 것입니다.

# 반(反)미학과 불법시생활
현대미술사에 반미학(反美學)이 있습니다. 다다이스트(dadaist)들의 반미학은 19세기까지 서양예술을 지탱해왔던 예술 원리들을 해체해왔습니다.

미술에서 액자는 예술영역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현대미술에서 액자가 사라지는 것은 예사입니다. 액자는 범상한 현실과 미적인 가상을 가르는 경계선으로, 액자의 안쪽은 미적인 가치의 세계라면 그 바깥은 범상한 사물의 세계라 할 것입니다.

마치 액자 안쪽이 불법의 세계라면 액자 바깥은 생활의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술과 현실의 구분을 무화시켜버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마르셀 뒤샹이 '레디메이드'(Ready-made)라는 형식
으로 변기를 미술관에 전시했던 것입니다. 즉 범상한 현실의 사물을 미적 가상의 세계라는 액자 안으로 들여놓은 것입니다. 화장실에서 배설물을 받는 변기가 작품이 되자 그것보다는 품위가 있는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도 예술이 될 권리를 얻게 된 것입니다.
반미학의 전략은 범상한 것과 미적인 것의 경계를 없애는 것입니다. 액자라는 기준이 사라지자 모든 것은 예술이 되고 예술은 또한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술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예술이 되는 것입니다.
성과 속, 가상과 현실, 미적인 것과 범상한 것의 경계는 사라졌으며, 이제 범상한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술이 될 수 있는 차별도 사라지고 범상한 사물과 아름다운 예술 사이의 위계도 사라지는 미적 민주주의의 평등과 예술적 무정부주의의 낙원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게 예술이 되고, 예술이 모든 것이 되는 '초미학(transaesthetic)'의 지점에서 예술은 더 이상 현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가치의 영역으로 존재하기를 멈추게 됩니다. 그 결과 현실에 실현된 미적 유토피아는 도리어 예술의 디스토피아를 초래할 수도 있게 됩니다.
과연 예술과 현실을 가르는 장벽은 허물어 질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전통적 예술이 예술에서 폐기되거나 일상품이 예술로 편입되는 부분적인 자리바꿈이 있을 뿐입니다. 예술이 완료되었다면 그 순간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의 생명은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술과 현실을 가르는 벽은 사라질 수 없는 것입니다. 현실의 일부가 예술이 될 수는 있어도 현실 자체가 전부 예술이 될 수는 없습니다.


# 불법과 생활의 긴장
마찬가지로 생활은 상황 상황에 따라 불법화 될 수는 있어도 생활이 늘 불법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불법화된 생활이라 하여도 상황이 달라지면 그 불법화된 생활은 불법성으로 화석화됩니다. 불법은 끝없이 생활화 되어야 하나 생활에 갇히면 안 됩니다.
상황과 장소와 시기에 따라 불법의 생활화는 달라지고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법과 생활의 간격은 상황 상황에 무화되어 일치될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없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불법과 생활은 가치 층위가 있는 것입니다. 불법은 항상 시대화되고 생활되고 대중화되는 과정 속에 가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불법과 생활의 긴장은 영원한 과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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