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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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를 향하여
  • 관리자
  • 승인 2017.03.22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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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7년 2월 1 7일(금)부터 2 1일(화)까지

제주에서 진행된 SEAL(school for east asia leadership, 동아시아 리더쉽 스쿨) 워크샵에서

발표한 박윤철(맹수) 교무 원고의 요약본입니다.

박윤철교무님.jpg

┃목차┃

1) 11년간에 걸친 '한일교류'의 성과와 그 의의
2) 사회변혁을 꿈꾸는 “운동가에게는 '로망'이 없어서는 안 된다”
3) 지금은 '근대'문명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시대
4)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를 향하여

# 11년간에 걸친 '한일교류'의 성과와 그 의의
1995년 7월에 홋카이도대학 문학부 후루카와강당(古河講堂) 구표본고에서 한국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두개골(頭蓋骨)이 방치된 상태로 1백년 만에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저는 1997년 4월부터 그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홋카이도대학에서 유학하고 있었습니다.
지도교수이신 홋카이도대학의 이노우에 카츠오(井上勝生) 교수님과 함께 한일 두 나라 공동의 진상규명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1997년 가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때 삿포로시의 어느 '야키니쿠점(불고기집)'에서 처음으로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나카츠카 교수님께서는 그때 '홋카이도대학 유골사건'을 둘러싼 한일 공동의 진상조사 활동(1997년까지는 역사문제를 주제로 한 한일(韓日) 양국의 공동연구 또는 공동조사가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의의에 대해 대단히 높게 평가해 주셨습니다.
그와 함께 1997년 7월 홋카이도대학 측이 발표한 최종보고서(유골사건에 관한)의 일부 내용을 머지않아간행할 당신의 저서(역사의 위조를 밝힌다,1998년)에서 소개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때가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님과 저와의 최초의 만남, 아니 '역사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오늘의 이 보고는 바로 1997년 가을의 저와 나카츠카 교수님과의 '역사적'만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후 후지국제여행사 이름의 해외여행 프로그램 형태로 '동학농민군 전적지를 찾아가는 여행'이 처음으로 이루어 진 것은 나라현(奈良縣) 역사교육자협의회 및 같은 현 퇴직교직원회 여러분들이 중심이 된 2002년 여름의 여행입니다. 그로부터 시작된 '동학농민전적지를 찾아가는 여행'은 2006년에 정기 여행프로그램으로 정착되어 작년까지 11년간 중단 없이 계속되었고, 올 10월에도 어김없이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2006년 이래 정기 여행프로그램이 된 '한일 동학기행'을 통한 저희들의 교류 성과와 그 의의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처음 단계부터 시민 상호간의 교류로 시작했다는 점, 즉 풀뿌리 시민 차원의 교류를 추진해 왔다는 점, 둘째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 의견교환을 통해, 그리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자주적(自主的)'이며 '자발적(自發的)'인 교류를 해 온 점, 셋째 '한일 동학기행'을 계기로 다양한 형태의 풀뿌리 교류를 만들어 내게 된 사실, 넷째 1회성 행사에 그친 것이 아니라 11년에 걸쳐 일본 측은 한국을 11회나 방문하였고, 한국 측에서도 5회나 일본을 방문함으로써 풀뿌리 교류를 계속해 온 사실, 다섯째 '역사의 진실' 앞에 진지하게 마주 섬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대립적 입장을 뛰어넘어 역사인식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것, 그리고 상대방 나라 안에 과거를 교훈삼아 공생과 평화의 미래를 향해 열심히 노력하고 계신 분들이 대단히 많이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저희들의 풀뿌리 교류는 많은 성과를 내 왔습니다만, 저는 또한 가지 중요한 내용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저처럼 근대 일본의 침략 때문에 지금까지도 커다란 상처의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인간, 즉 피해자인 저희들의 마음속에 어느 샌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싹 터 오르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나카츠카 교수님께서 번역해 주신 저의 부끄러운 글 '5월 광주가 나에게 남긴 것(한국어판;「 녹색평론」2006년5-6월호, 일본어판「미스즈」548호, 2007년 4월호)」속에서 고백했듯이, 한국에서는 1980년 5월의 '광주사건'이래 많은 분들이 언제나 자기 자신을 강하게 자책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나라의 절망의 역사를 희망의 역사로 바꿀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화두들 들고 그 길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워 왔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사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 온 고통스런 역사 그 자체였습니다. 실패와 관련한 제 경험 한 가지를 말씀드린다면, 1987년의 '6월 항쟁(민주화운동)'과 그 다음 해에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 때가 생각납니다. 그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설(附設)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가 학위 논문을 써야했던 저는 공부보다는 데모를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대학원의 어용교수(御用敎授)들에 대한 반대 데모를 조직하였고, 그 다음에는 노동조합을 만들어 스트라이크를 주도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1995년 까지 약 10년간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없게 되었고, 국립 연구기관에 합격했지만 노동조합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면접시험에서 떨어져 취직도 할 수 없는 고통스런 시간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무렵 저와 관련된 일은 「한겨레신문」에 빈번하게 보도됨으로써, 저는「한겨레신문」의 단골취재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고통스런 시기에 제 인생 최대의 행운(幸運)이 찾아 왔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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