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문과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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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문과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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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4.13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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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튼교무의 정전산책 (89)

방길튼교무님.jpg

계문은『정전』에서 수행의 한 방법으로, 「법위등급」에서는 법위향상의 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대종사님은 계율이 사람의 순진한 천성을 억압하고 자유의 정신을 속박하여 도리어 교리의 신성함을 꺼리고 주저하게 한다는 반문에 대해서 초학자에게는 분명히 계율이 필요하고 사람은 서로 더불어 살기에 불의한 행동을 스스로 제재하는 계율이 필요하다 하시며, 법위 단계별로 계문을 제시하여 그 당위성을 밝히고 있습니다.(교의품 25장)

# 좋음과 옳음 그리고 계문

과거의 윤리는'옳음-그름'의 문제였습니다. 절대적인 옮음이 있고 그 옳은 규범에 맞추어 사는 규범 윤리사회였습니다. 유교의 삼강오륜과 기독교의 10계문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이에 비해 현대사회는 개인의 자율성이 주체가 되는 사회로 윤리에 있어서도 개인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 관점이 중심이 됩니다. 즉'옮음-그름'의 윤리보다는'좋음-싫음'의 윤리가 더 중시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인주의가 기반이 되는 현대사회에서는 '좋음-싫음'의 개인주의적 윤리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옳음-그름'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냐가 현대윤리의 핵심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계문은 단순히 '좋음'의 문제에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개인차원의 '좋음'만이 아니라 상호 관계의 '옳음'이 창출되어 하는 것입니다. 계문은 개인적으로 좋다는 것도 관계적으로 옳은 가치에 바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옳음'의 근거는 무엇이 될까?


# 옮음의 보편성과 연고의 상황윤리
상대가 끊어진 절대적 차원에서 보면 나와 너의 분별이 없습니다. 이는 나 아님이 없는 모두가 나인 차원입니다. 그러나 현실계는 나와 남의 구분이 있고 나의 이익과 남의 이익은 상충됩니다. 절대적 차원에서 현실적 차원으로 전개될 때 나도 좋게 하고 남도 좋게 하는 마음(自利利他)이 윤리의 근거가 됩니다. 상호 좋음을 추구하는 상충적인 상황에서 옳음을 도출하는 것이 상황윤리이며 계문의 필요성입니다. 옳음은 보편성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듯 남도 좋아하는 것을 좋아지도록 하며, 내게 고통스런 것을 싫어하듯 타인의 고통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심정이 보편성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나의 주관(좋음의 윤리)을 최대한 타인의 입장에서 보편화(옳음의 윤리)시키는 것입니다. 계문도 이런 역지사지의 보편성에 바탕하여 읽어야 할 것입니다. 타인의 기쁨과 아픔에 공감하는 차원의 윤리로, 이런 보편적 관점이 옳음의 윤리라 할 수 있습니다.

실천적 관점에서 동기가 좋은 것 이 윤리적인 것인지? 아니면 목적에 맞게 결과를 좋게 하는 것이 윤리적인 것인지? 선을 적극적으로 안하면 그것도 악으로 볼 것인지? 적극적으로 악을 해야만 악이라 할것인지? 그 기준도 다를 수 있습니다. 무척 상황적이고 상대적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연고(緣故)를 넣어주신 것은 현대사회의 '상황윤리'를 고려하신 자비로, 상황을 무시한 윤리는 강압과 폭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연고 없이 사육을 먹지말라”는 육식은 윤회하는 과정에서 행해서는 안 되는 무조건 악한행위인지? 인간은 고기를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존재인지? 아니면 육식이 생존에 필요한지? 문화적으로 육식이 조장되어 있는지? 또는 역사적으로 식량부족의 문제로 육식을 금한 것인지? 이런 모든 조건을 고려하여 살펴보아야할 것입니다. 사료 200㎏을 먹여 고기 1㎏을 얻는다면 육식은 식량차원에서 소비적이고 사치적이며 다른 생명과 식량을 빼앗는 것이 됩니다. 육식에 '연고'가 있는 것은 근본적으론 생명존중의 차원에서 권장하신것이나 그렇다고 육식자체를 금하진 않은 듯합니다.

결국 육식도 상황적입니다. 육식은 절제하되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금하진 않는 것입니다. 나는 육식을 안 한다 해도 육식을 해야 되는 사람이 있으니 이를 강제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육식하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면 안 먹는 것을 선택하면 되고, 육식을 먹어야 할 경우는 미안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서 그 공덕으로 생명이 존중되고 진급되도록 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고성(緣故性)이며 더 나아가 모든 생명과 존재를 존중하는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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