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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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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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4.2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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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상작가의 ‘인문학으로 대종경읽기’(20) ㅣ 정법현 교도(북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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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은 교의품 11장에서 '일원'과 '서가모니불'의 관계에 대해 말했다. 소태산은 일원을 진리의 근원이라고 하였고 석가모니를 스승이라고 하였다. 또한 진리의 근원인 일원이 없다면 서가모니불도 없다고 설명하였다. 이어 법신불일원상을 법신여래(法身如來)라고 하였고 서가모니불을 색신여래(色身如來)라고 하였다.
나는 일원상과 서가모니불과의 관계에 대한 소태산의 법어를 읽으면서 장 폴 싸르트르와 그의 실존주의를떠올렸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참으로 유명한 진술이며 문장이다. 여기에 싸르트르 실존주의의 핵심이 담겨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윤리시간에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온몸을 떨었다. 그러나 수박 겉핥기로 가르쳤으니 갈증만 키우는 문장이 되고 말았다. 이미 문장에 매혹당한 나는 결단했고 학교 담장 밖으로 나갔다.
문장의 유혹에 무너져 기어이는 수없는 날들을 결석(고등학교 3학년 때에만 1년에 60여 일을 넘게 결석하였다.)하며 학교 밖의 도서관에서 고전을 읽었다. 그중에 싸르트르도 있었다.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싸르트르를 읽은 기억이 별로 없을 정도다. 내가 이해한 실존과 본질의 개념적 관계는 다음과 같다.

여기에 “밥”이 있다. 밥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쌀, 보리 따위의 곡식을 씻어 적당량의 물과 함께 끓여 익힌, 끼니로 먹는 음식”이다. 어떤 사람은“밥은 평화며 생명”이라고도 한다. 밥이 평화며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주관적 해석에 가깝다. 밥의 본성은 “쌀, 보리 따위의 곡식을 씻어 적당량의 물과 함께 끓여 익힌, 끼니로 먹는 음식”이다. 반면에 밥의 실존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실재의 밥”이다. 만일 실재의 밥이 없다면 밥의 사전적 정의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먹을 수 있는 실재의 밥이 없는데, 밥의 본성이 '생명이요 평화요 혹은 신의 선물이요'라고 떠들어 본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실재의 밥이라는 실존(實存)이 없으면 밥에 대한 사전적 정의와 철학적 해석으로 구성된 밥의 본성(本性)또한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핵심이다. 싸르트르는 실존주의를 다음과 같이 전개했다.
'인간본성이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본성을 구상하기 위한 신이 없기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실존 이후에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기 때문에, 또 인간은 실존을 향한 이 같은 도약 이후에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과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엮음,「 문명전개의지구적문맥Ⅰ-인간의 가치탐색」,「 인간의선택과책임」, 경희대 출판문화원, 2011, 318쪽)

원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인간본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싸르트르의 진술은 철저히 기독교적이다. 비록 싸르트르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반기독교 차원의 철학적 전개 또한 철저히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할 수 밖에 없다. 싸르트르 이전에도 니체가 충분히 보여주었던 세계였다.

싸르트르는 기독교적인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본성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싸르트르의 이러한 주장은 결국 반쪽이다. 기독교 밖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르트르의 논리를 확장해보면, '인간이라는 실존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본성 또한 존재하는 것'이 된다.

소태산은 인간의 본성은 일원이라는 진리의 근원에 바탕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태산은 “진리의 본질(본성)은 법신불일원상이라는 법신여래고 진리의 실존은 서가모니불이라는 색신여래”라고 말했다. 법신여래와 색신여래는 서로 다른 것인가? 그 해답은 반야심경에 있다.
법신여래가 곧 색신여래이며, 색신여래가 곧 법신여래인 것이다. 싸르트르의 분별지로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진리의 경지를 소태산은 일원지로 펼쳐 보인 것이다. 법신불일원상은 진리의 본질이고 우리가 매일 만나는 실재의 일원상은 실존한다. 본질로 존재하는 것은 진공(眞空)하며 실존은 묘유(妙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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