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부처가 어디 계시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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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부처가 어디 계시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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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6.03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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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상 작가의 ‘인문학으로 대종경 읽기’ 22 l 정법현 교도 (북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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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는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졌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석가족의 왕자로 태어났고, 출가하여 수행하였고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 부처가 된 뒤에야 비로소 성자라는 뜻의 '모니'가 되었다. 싯다르타에서 석가모니가 된 것은 산 사람이 산 부처가 되었던 최초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의문이 남는다. 과연 최초로 부처가 된 사람이 싯다르타였을까? 혹시 싯다르타 이전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며 사랑하다가 수행을 했고, 그 과정에서 대각하진 않았을까? 그들은 부처가 아닌가? 왜 부처로 현신한 존재는 석가모니 하나인가?


사실적으로 존재했었던 사람이 부처가 된 경우를 제외한다면, 불가에 전해져오는 저 수많은 부처들은 모조리 인간이 허구적으로 꾸며낸 존재들이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부처의 종류”를 검색해보면 허구의 부처들에 대한 설명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약사불, 관세음보살 등등.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인간으로 살았다는 기록은 없다. 이들 부처는 결국 인간의 상상 속에서 지어낸 존재들이다.


절에 들어서면 맨 먼저 만나는 문이 일주문이다. 일주문 중간에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그 중에서 동쪽을 수호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이 있다. 지국천왕은 “수미산 동쪽 중턱의 황금타의 천궁(天宮)에 살고 있으며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어 항상 인간을 고루 보살피며 국토를 수호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얼굴은 푸른빛을 띠고 있으며, 왼손에는 칼을 쥐었고 오른손은 허리를 잡고 있거나 또는 보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형상을 취하고 있다. 그는 휘하에 팔부신중의 하나로서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기만 맡는 음악의 신 건달바(乾達婆)를 거느리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천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현실에서는 존재가 불가능한 사천왕의 이야기를 지어낸 것은 인간이다. 동물이 이야기를 지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사천왕은 스스로 존재한 적도 없기 때문에 그 자신의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 상상계에서 만들어졌으나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나무 조각으로 제작되어 일주문 속에 앉힌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부처를 지어냈으니 당연히 그에 따르는 여러 존재들도 지어냈어야만 했다.


그런데 부처나 사천왕이나 모두 인간의 현실적인 염원이 강력하게 투영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상상 속에서 비현실적인 존재를 만들어냈고 현실에서 그들을 모셨다. 인간의 염원이 투영된 일련의 상상이 이야기로 만들어지고 또 이야기가 조각이나 등상불, 탑이나 건축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미학에서는 '주술'이라고 부른다. 문화예술은 바로 이 주술에서 탄생되었다. 물론 주술의 비현실에는 현실이 첨예하게 담겨 있기 마련이다. 장자의 이야기가 비현실적이지만 대단히 현실적인 연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태산은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했다. 불가의 비로자나불을 법신불사은으로 전환한 것이 소태산의 첫 번째'경계 넘기'였다. 진공(眞空)-현실에서 색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묘유(妙有)-허공법계에서 공으로 존재하는 법신불사은의 현실성에 대해 소태산은 강한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소태산은 플라톤적인 이데아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미메시스(mimesis, 자연의 재현)를 중시했다. 이데아를 이미지화한 불상 등에 적공하지 말고 그 이데아가 현실 안에서 미메시스되어 실재하는 것에 적공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노부부와 며느리의 일화로 나타나고 있는것이다.


부처는 이데아면서 동시에 미메시스다. 이데아기 때문에 비현실의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 존재를 조각이나 불상 등으로 만들어 숭배해왔다. 기독교나 불교가 플라톤주의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데아에 대한 숭배에 연유한다고 볼 수도 있다. 소태산은 부처가 이데아지만 현실에서는 수없는 미메시스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복제를'시뮬라시옹(simulation)'이라고 한다. 소태산은 프랑스에서 장 보드리야르가 현실의 무수한 복제를 의미하는 '시뮬라시옹'의 관계를 밝히기 전에 이미 그 내용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시뮬라시옹을 통해 만들어진 대체물이'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즉, 교회나 절집에 서 불공을 드리고 숭배하는 십자가나 온갖 불상들은 모두'시뮬라크르'이다. 시뮬라크르의 뜻을 아주 단순화하면 '가상의 대체물'이다.


소태산은 시뮬라크르에 숭배하는 것은 경계하고 미메시스로 돌아와 실지불공을 하라고 하였다. 소태산은 노부부의 며느리를 '산 부처'라고 했다. 이것은 시뮬라크르가 아니라 미메시스의 발현이다. 소태산은 이미지로 대체되는 부처가 아니라 실제로 현실에서 작용하는 부처에 대해 자주 말하였다. 길고 긴 불교의 역를 보면, 죽은 부처만 시물라크르로 모시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불교에서는 아직까지 그 누구도 산 부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원불교에서는 소태산이 못된 며느리를 산 부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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