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안 오피니언] 성자의 일대기를 살린 해학과 신명의 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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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 오피니언] 성자의 일대기를 살린 해학과 신명의 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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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6.17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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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불교 서사극‘이 일을 어찌할꼬’를 보고-

한울안오피니언(김형수).jpg

김형수 작가(소태산평전 저자)

한 마디로 모닥불 같았다. 백석의 시 '모닥불'에서는 때가 지난 것, 쓸모를 잃은 것, 버려진 것들이 어울려 배고픈 세상을 살찌게 하는 모닥불이 된다. 마을사람도, 행인도, 비렁뱅이도 모여서 그 불을 쬔다. 한 인간의 체험적 질서를 세계와 단절된 내면의 동굴 속으로 굴착해 들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근대 서사의 자폐증들과는 전혀 다른 대면이었다. 소태산 대종사의 일대기를 추적한 후에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던 것들, 예컨대 타리 파시와 바랭이네와 혈인성사, 안창호, 제자가 된 형사… 들이 갑자기 눈앞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 좁은 무대 위에서 소리와 율동과 그림자와 대사들이 자아내는 느낌은 문자로 통용되는 것들과는 전혀 다른 실감을 주었다. 소태산의 어린 시절을 그림자극으로 펼칠 때는 후반부를 어떻게 감당할까 긴장감을 안겼다가, 풍랑을 만난 난파선의 구도(構圖)에서는 예전에 일리야레핀의 그림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을 보았을 때처럼 놀라게 하고, 나중에 상여 나갈 때 “울지 마, 울지 마.” 외치는 장면에서는 연극이라는 장르를 우러러보게도 했다. 작년에 「소태산 평전」을 쓰면서 말미에 김형오라는 인물을 넣고 싶은데 자꾸 분량이 길어져서 빼고 말았다. 그런데 운구행렬 속에서 누군가 외치는 장면 하나로 그것을 저토록 생생하게 살려내다니!


절대 권위를 갖는 한 성자의 생애를 실로 대범하게 파헤치고 들어가는 해학과 신명의 내공이 얼마나 장쾌했는지 모른다. 전통과 현대를 놓치지 않는, 그러면서 언어 미학이 넘볼 수 없는 시각적 장치와 춤, 음악, 또 거기에 어려운 대사를 제대로 육화해서 내놓는 배우들의 역량이 빚는 효과들이 한순간도 눈길을 옮기지 못하게 만든 게 사실이다. 장엄한 서사시 같기도 하고, 신나는 마당놀이 같기도 하며, 때때로 동화 애니메이션 같기도 한 경이로운 충돌들이 종합예술적 묘미를 유감없이 살린 것이다.


원불교 서사극 '이 일을 어찌할꼬!'는 그런 의미에서, 내 식으로 말하면, 인간의 목숨이 가장 비참하게 여겨졌던 현장에서 세상 바깥으로 달아나는 신비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실 안에 시선을 파묻어 버리는 폭력주의도 아닌(나는 이 둘을 난처한 세계를 등지는 도피의 상반된 방법들이라고 본다), 놀라운 길을 찾아낸 성자의 생애를 그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권력이 세계의 참 모습을 가리면 예술은 감춰진 현실을 드러내는 새로운 문법을 찾아낸다. 핍박의 경험이 클수록 표현의 깊이도 심오해진다. 우리 옛 경험 속에는 그것이 만들어낸 미학적 유산들이 셀 수도 없이많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 예술이 처한 가장 큰 난관은 외래 미의식을 탐내다가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 미학의 상속자인 이윤택 작가의 원불교 서사극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그 덕분에 우리는 이제 우리는 보다 나은 꿈을 꾸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저 무대 위에서 구현된 것들이 '대종사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아는 분들의 머리에 담긴 것과 비슷한 것이 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교리가 아니라 소태산대종사님의 동시대인들이 체험했던 실감의 세계를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원불교의 숙제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하여튼 이 연극은 뭔가 하나의요한 모델을 던져놓은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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