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과 성리
상태바
좌선과 성리
  • 관리자
  • 승인 2017.07.20 20: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길튼교무의 정전산책 (97) ㅣ 방길튼 교무(나주교당)

방길튼교무님.jpg

소태산 대종사의 발심·구도과정은 일어나는 의심에 몰두하여 그 의심을 궁구하고 궁구하더니 끝내는 그 의심마저도 탈락된 입정돈망(入定頓忘)에 드시어,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까지 다 쉬어버린 존재로만 있게 됩니다. 그리고서 일체의 한계와 분노 원망 등의 분별·집착을 다 초월한 자리에서 만유와 만법이 한 체성 한 근원으로 드러나는 대각을 하십니다. 이러한 의심 궁구의 구도 과정은 의심하는 마음 본래(自性)를 관조하여(見性) 그 원리를 해결하여 알자는 성리 수행과 상통해 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분명 '의심' 당체를 직관하는 성리적 수행방법을 통해 대각을 하셨으나, 그 대각의 묘책인 성리 수행법을 정기훈련 11과목의 하나로 제시 할 뿐입니다. 이는 의심나는 마음 바탕을 관(觀)하는 성리 공부만을 깨달음의 유일한 방법으로 한정하기 보다는 여러 방법의 하나로 제시한 것입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수양하는 시간에는 단전주법(丹田住法)으로 온전히 수양만 하고 화두 연마는 적당한 기회에 명랑한 기틀을 따라 가끔 한 번씩 하는 것이 의두 깨치는 데에 더 우월한 방법이라고 권하십니다.(수행품 14장)


왜냐하면 의심 삼매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성리 공부는 그 방법을 잘 알아야 하고 혹여 그 길을 잘 몰라 헛된 고행에 드는 폐단이 있으므로(수행품 47장), 이를 해소하기 위해 간단하고 편이하여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전주 좌선법을 병행케 한 듯합니다.


단전주는 하루 중 정시(定時)나 정기훈련 기간에 시행하는 좌선법으로, 단전주 좌선법은 단전을 마음과 기운의 주처(住處)로 삼아, 호흡을 통해서 단전에 기운 주(住)해 있는 것만 대중 잡되 방심이 되면 다시 챙겨서 기운 주하기를 잊지 않는 수행법입니다.


이러한 단전-대중에는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으면서 아울러 단전-일심만 확연해집니다. 이때 이 단전-일심 상태를 통으로 직시하면 이 자리는 원래부터 단전주만 두렷이 드러내고 있는 성성(惺惺) 자체이며, 단전주 외에는 어떠한 자취도 없는 일체가 텅 빈 본래 적적(寂寂)한 모습입니다. 이는 대상을 온전히 비추고 있는 거울에서 그 대상을 치워도 거울은 원래부터 항상 청정하게 훤히 비추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망념이 쉬고 적적성성한 진여의 본성(眞性)이 앞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정전』「좌선의 요지」)


이처럼 호흡을 통해서 단전에 기운 주하는 대중을 잡는 마음자리는 그대로 진여의 본성입니다. 이 단전-대중의 한마음(오직! 단전주)을 잡으면 번뇌 망상이 붙을 수도 없으며 안다 모른다 등의 분별에 떨어지지도 않는 무분별의 한자리에 들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타의 분별인 물아(物我)의 구분을 잊고 시간과 처소를 잊고 오직 두렷하면서 고요한 무분별(圓寂無別)의 진경에 그쳐서 다시없는 심락(心樂)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정전』좌선의 방법)


이러한 단전주의 좌선은 성리의 수행법과 관통해 있습니다. 집중하고 관조하는 대상이 다를 뿐, 좌선은 주하는 자리가 단전이라면 성리는 일어나는 마음이나 의심인 것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어린 시절부터 이런 저런 의문이 일어나 그 의문을 궁구하다가 그 알고자하는 의심(궁금함)에 몰입되고 끝내는 그 의심마저 놓아버린 입정에 드신 후 출정하시어 마음의 본래를 확연히 나타내십니다.


이와 같이 아침 수양시간에 입정 후 출정하여 성리 관조를 잠간씩 병행토록 한 의도는 먼저 단전주 선법으로 적적성성한 무분별의 선정에 들어 그 자리를 누린 후 출정하여 그 맑은 정신으로 의두(의심거리)를 직관하여 무분별지(無分別智)의 자성을 밝히도록 한 것입니다.


즉 수양시간에는 단전주를 대중 잡아 정(定)을 세워 혜(慧)를 드러내는 체정용혜(體定用慧)의 성품자리에 입정하고, 연구시간에는 출정하여 그러한 원래마음을 반조하여 혜를 드러내 정에 안주하는 용혜체정(用慧體定)의 자성을 밝히자는 것입니다.


좌선은 정력(定力)을 얻는 가운데 혜력(慧力)이 아울러 있고(定不離慧), 성리의 경우는 반대로 혜력을 나타내면서 그 바탕에 정력이 있는 것입니다.(慧不離定) 단전주와 성리 관조는 정혜쌍수의 자성을 체험하는 쌍방적 공부로 그 구경이 상통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