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이 이 시절에 다시금 태어나기를 갈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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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이 이 시절에 다시금 태어나기를 갈망하는가?”
  • 천지은 교도
  • 승인 2019.02.27 02:04
  • 호수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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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만나는 한국 토착 사상 기행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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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소태산의 이야기를 할 때가 왔다. 그러나 이 글에서 원불교의 교리와 소태산의 생애, 사상의 대강과 세목을 말하는 것은 주제를 넘어서는 일이다. 그렇게 할 자신도 없다. 다만 내가 신앙하는 원불교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내가 원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벌써 이십여 년이 훨씬 지난 일이다. 첫 직장에서 연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어느 날, 원불교학과에 다니는 학생으로부터 서원관 오픈하우스에 초대를 받았다. 그날도 밀린 일을 허겁지겁 처리하느라 약속 시간보다 늦게 원불교 중앙총부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예비교무님은 환한 미소로 금세 나를 딴 세상으로 안내했고, 그곳에서 만난 이들은 모두 천상의 사람들 같았다. 표정은 하나같이 온화했으며 발걸음, 말소리, 작은 행동조차 평소 내가 만나 왔던 사람들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4년 내내 다녔던 대학캠퍼스와 불과 큰길 하나 사이에 두고 이런 곳이 있었다는 것에 그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는 다른 세상이었다. 연신 감탄하며 성지를 둘러보고 나는 성탑 아래 서서 길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나 자신에게 묻게 되었다.

그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96년 가을, 나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총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지금까지 원불교 언론, 출판, 문화기관에 근무하며 방방곡곡을 카메라와 더불어 떠돌았고 글을 썼다. 도시, 농촌, 어촌…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에서 숱한 풍경과 사람들을 만났다. 때론 교단이 변화 발전하는 모습에 기뻐한 날도 있고, 때론 결코 변해서는 안 되는 가치와 이념 사이에서 안타까워한 날도 부지기수다.

그러면서 나도 함께 성장했다. 원불교 교전을 읽으면서 소태산 박중빈의 개벽관을 이해하려고 무던히 애쓰다 보니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바뀌게 되었다. 최근 원불교 개교 표어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에 다시 주목하고 있다. 소태산이 그랬던 것처럼 배고픈 정신문화나 타락한 물질문명으로는 진정한 이상세계가 올 수 없음을,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의 동반 개벽이 되어야 함을 짐작하게 되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교세가 확장되고 삶이 윤택해졌다고 해서 반드시 개벽이 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올해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는다. 원불교 역시 열악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열악했기 때문에 더 막중한 사명이 주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마치 몸에 병이 없으면 약이 필요 없는 것처럼 시대적 상황에 원불교가 필요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에 여러 곳에서 '다시 개벽'을 이야기한다. 원불교 안에서가 아니라 원불교 밖에서 '다시 개벽'을 이야기하고 사람들이 조금씩 모이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개벽'을 이야기하는 것은 '개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원불교에 묻고 싶다. “소태산이 다시 태어나기를 갈망하는가?” 나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머뭇거리고 있다. 소태산은 이미 왔고 이미 다녀갔고 그 사상을 세상에 뚜렷이 남겼으나 개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개벽은 말(言語)이나 텍스트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총부에 넘치는 말들이 모두 허상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질문 앞에 나는 외롭게 서 있다.

천지은 교도(원불교출판사 편집장, 남중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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