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지진 복구현장 모니터링 다녀오다
상태바
인도네시아 지진 복구현장 모니터링 다녀오다
  • 강명권 교무
  • 승인 2019.04.03 11:20
  • 호수 11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해 8월, 인도네시아 지진현장을 다녀와서도 늘 불안감이 컸다. 아니나다를까 또 다른 지진이 발생해 다른 지역에 많은 피해를 안겼다. 여진을 감당하기도 쉽지 않은데 또다시 지진 피해를 입은 만큼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불안은 더해 갔다.

인도네시아는 2006년에도 족자카르타에 지진이 일어 20여 만 명이 사망했다. 그때도 원불교재해재난구호대가 파견돼 현장을 살펴보고 약 20여 명이 복구지원 활동을 펼쳐, 벰버하우스 110채와 고아원 등을 지원했다. 당시 그곳은 1~2분 정도의 지진에도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 벽돌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 지진은 아예 한마을에서 3개 동마을이 매몰돼 시신조차 찾을 수 없는 정도로 상황이 나빴다. 현장에 당도한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했고, 눈물이 저절로 쏟아졌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끔찍한 피해현장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과 아이들을 돕는 것이었다.

다시 올해 3월 초, 재해현장을 찾았다. 현장지원사업 모니터링을 하러 가는 길은 녹록지 않았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서, 비행기 안에서 쪽잠을 자고, 인도네시아에 도착하자마자 현장으로 달려가 실사를 진행해야 했다. 통역이 제일 걱정이었는데 세계봉공재단의 이혜진 교무의 아버지가 인도네시아 포스코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도움을 얻었다. 직원 중 한국어 공부를 한 인도네시아인이 우리 팀에 합류해 모니터링을 도왔다.

현장에서, 복구사업은 적어도 1~2년 이상 걸릴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피해현장을 빠져나와 대피소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당시 주민들에게 복구지원과 상담을 해줬던 자원봉사자들도 많이 빠져나갔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인도네시아에는 대학생, 대학원생의 자원봉사자들이 현장에 많았다. 이유는 재난구역 자원봉사활동을 하면 학점과 출석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길게는 3개월, 한 달 정도 머물렀다. 그들은 대부분 현장 모니터링을 하거나, 현장 코디네이터로 활동했다. 또한 물품을 배분하거나 민원을 처리하는 활동도 했다. 매우 보기 좋았다.

현장을 다니다 보면 아직도 복구해야 할 곳이 너무도 많다. 지역에 따라서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곳도 있고, 반대로 지원을 받지 못한 마을도 있었다. 아무래도 외부 접근이 용이해 방송에 많이 나오거나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곳은 지원이 많고 그 반대 지역은 정부 지원을 받기 힘들어 민간단체나 국제단체들이 돕고 있었다.

매몰된 지역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는 아무래도 물 공급이 어려운 편인데 다행히 우리가 샘을 파 준 지역은 유일하게 물 공급이 잘 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 또 집이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감에 근처에서 텐트를 치고 지냈다.

우리와 같이 구호활동을 하기로 한 인도네시아 구호단체는 100여 년이 된 구호활동단체(MDMC)로 우리 봉공회와 비슷한 성격의 조직이었다. 하지만 우리 봉공회보다 훨씬 많은 활동가와 자원봉사자들이 있을 뿐 아니라 학교 및 병원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들과 함께 진행할 사업은 쉘터(임시주택) 1,000개를 지어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쉘터마다 들어갈 가스버너 1,000개와 쌀, 기름 1,000개씩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현장 모니터링을 해보니 쉘터 지원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알아보니 정부가 쉘터 지을 토지를 허락해 주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나누기로 한 물품은 정상적으로 지원되고 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인도네시아에 또다시 지진이 나지 않기를,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복구지원에 나서줘서 이재민들의 삶이 편안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했다.

글·사진=원봉공회 강명권 교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