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인, 공부길] ‘나를 다시 살게 한 감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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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인, 공부길] ‘나를 다시 살게 한 감사일기’
  • 김미래 교도
  • 승인 2019.06.13 10:38
  • 호수 11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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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곡교당 김미래 교도

나는 일곱 살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중구교당에 첫발을 내딛고 원불교에 입교했다. 어린이법회를 시작으로 학생시절은 원불교와 함께 성장했다. 어머니(한도중 교도)는 내가 교당에 가지 않으면 혼낼 정도로 법회 출석과 훈련을 중시했다. 그렇게 일반법회까지 가랑비에 옷 젖듯 신앙의 뿌리를 키워갔다.

나의 영원한 짝꿍 김정진 교도와 결혼한 후, 우리는 강원도 화천교당으로 전출해 법회 출석도 하고 아들딸을 낳아 일원가족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장교였던 남편을 따라 경남 사천교당, 경기도 파주교당, 대전 계룡교당을 다니며 신앙심을 키우다가 원기97년 화곡교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 나에게 경계가 왔다. 한 5년간 이런저런 핑계로 한 주 법회를 빠지더니 또 빠지고 결국 법회에 소홀해졌다. 그런 나를 이끌어준 것은 지금의 화곡교당 박근영 교감교무님이었다.

지난해 1월 교당에서 교도님 병문안을 갔는데 그때, 핸드폰으로 감사일기를 기재하는 방법을 알았다. 나는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감사할 일이 있을 때마다 핸드폰에 메모해 두었다가 저녁에 집에 돌아와 감사노트에 일기를 옮겼다. 처음에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감사한 일들만 적었다. 그렇게 감사일기도 쓰고 법회 출석도 잘해 보리라 다짐하고 반백일 기도를 하고 있는데 그해 4월 큰 경계가 닥쳤다.

티브이에서만 보던 교통사고가 나에게 일어난 것이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에 부딪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있었다. 다행히 병원 주차장에서 일어난 사고라 바로 입원할 수 있었다. 법신불 사은의 은혜 속에 오른쪽 무릎만 골절되고 다른 곳은 멀쩡했다. 그러나 할 일이 많았던 나에게 못 움직인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고3 수험생 아들의 보호자, 탁구선수 딸의 매니저, 집안일 등등 모든 것이 멈췄다. 다리 수술 후 3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나는 아이들에 대한 애착심도 내려놓고,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면 감사히 즐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선 사고를 낸 가해자에 대한 미움과 원망심을 내려놓고, 병실에서 일원상서원문과 참회문을 매일 3독씩 써가며 심신을 치료했다. 우리 가정에 큰 변화를 준 경계를 내 인생의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의 기회로 여기고 감사했다. 그 배경에는 교당 교무님과 교도님의 지극한 관심과 배려가 있었다.

엊그제 수술한 거 같은데 벌써 일 년이 지나고 지금은 열심히 재활하며 예전의 건강했던 김미래로 돌아가는 중이다. 병실에서부터 시작한 일원상서원문과 참회문 3독(사경 병행)은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다. <원불교 전서>를 사경하며 대종사께서 밝혀준 말씀과 진리에 부합되는 삶을 살고자 노력 중이다. 요즘은 학교에서 ‘감사 한 줄 쓰기’를 알려줬다는 딸 도연이와 함께 감사일기를 쓰는 중이다.

돌아보면 힘들고 아프고 짜증날 때 옆에서 늘 함께해 준 가족에 대한 감사함과 미안함, 소중함을 감사일기로 채운 것 같다. 영원한 나의 짝꿍 김정진 부처, 든든하고 멋진 미래의 셰프 김형주 부처, 예쁘고 착한 미래의 국가대표 탁구선수 김도연 부처! 영원히 사랑하고 감사해!

감사일기를 통해 나는 계속 변할 것이고, 마음공부로 진급하는 삶을 살 것이다. 이름처럼 ‘미래’가 아름다운 멋진 원불교인이 되고자 나는 오늘도 경계에 무너지지 않고 공부심으로 나날이 발전하기를 서원한다.

-화곡교당 감사일기 콘서트 발표자-

화곡교당 김미래 교도

6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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