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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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일본인
  • 라도현 교도
  • 승인 2019.12.05 01:03
  • 호수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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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의 空卽是色10
일본인 ① “전시 일본이 위안부를 강제 동원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의 위안부는 인신매매의 희생자였을 뿐이다. 일본 측에서 위안부 피해자에게 직접 사죄하는 것은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총리)
 
일본인 ② 마을의 한 처녀가 임신을 하였습니다. 아이의 아비가 누구냐고 부모가 추궁하자 이웃 절에 있는 하쿠인(白隱) 스님이라고 하였습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부모가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이 중놈아! 어찌 우리 딸을 이렇게 망쳐 놓을 수 있느냐!” 하쿠인이 잠자코 있다가 말하였습니다. “그래요?”
몇 달 뒤에 아기가 태어나자 그 부모는 아기를 하쿠인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이 놈아! 너의 씨앗이니 네가 키워라.” 하쿠인이 대꾸하였습니다. “그래요?”
하쿠인은 정성스레 아기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1년쯤 지난 어느 날, 그 처녀가 부모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아기 아빠는 스님이 아니라 실은 어물전에서 일하는 총각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부모는 얼굴이 파래져서 스님을 찾아가 백배사죄하고 아기를 데려가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쿠인 선사가 또 말하였습니다.
“그래요?” (일본, 18세기)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화를 참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아무런 이유 없이 남에게 심한 모욕을 받으면, 속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화를 식히기란 쉽지 않습니다.
 
화라는 것은 의지(意志)로써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며, 생각을 안 한다고 쉽게 벗어나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성(理性)으로써 이렇게 화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지금 내가 화가 난 것은 이러이러한 것 때문인데, 그것은 내가 저러저러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다시 생각해서 이해하면 조금도 화날 게 없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임시적인 것이며, 근본적 해결법이 아닙니다. 매번 화날 때마다 화를 가라앉힐 논리적인 이유를 찾으려 생각을 굴리는 것은, 마음의 근본을 모르는 방편적 수행입니다.
 
가령, 일본 아베 총리가 줄곧 우리 위안부피해자들에게 하는 언행을 보면, 아무리 그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성의 한계입니다. 그렇다고 마음을 편안케 하기 위해서 잘못된 일을 잊으려고 하는 것도 실은 바른 공부가 아닙니다.
 
이처럼 화는 참거나, 그 까닭을 이해하거나, 잊는 것으로써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쿠인 스님은 어떻게 억울한 모욕을 당하면서도 저리 담담할 수가 있을까요? 처녀의 딱한 처지를 동정해서였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스님은 나중에 자신의 행위를 후회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이나 감정에서 나온 동정심은 늘 상(相)이 있기 마련입니다.
 
무릇, 화라는 것은 언제나 그 사물에 대한 주착(住着) 때문에 일어납니다. 누구라도 마음에 주착이 없다면 바르게 보고, 듣고, 느끼고, 판단하면서도 아무런 화가 나지 않습니다.
 
화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시비선악을 모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렷이 밝게 알면서도 그것에 집착되어 속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가능한 것은 자성의 혜(慧)가 자성의 정(定)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12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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